어설픈꿈

수필 - 체온

공현 2008. 1. 8. 01:16
체온

(2004.08.)

 

 서기 2004년은 더운 여름이었다. 여름. 많은 사람들이 덥다고 난리를 쳐대고 있다. 40년만의 무더위. 낮이면 나는 어느 도시는 섭씨 33도, 어느 도시는 섭씨 35도까지 올라간다고 하는 아침의 일기예보를 상기하며 섭씨 36.9도 근처는 될 법한 공기 속에 가만히 앉아있고는 했다.
 
 체온이 남아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뜻한다. 죽음은 많은 경우에 싸늘한 이미지로 다가오고, 차갑게 식은 몸은 섬뜩한 죽음이 깃든 몸, 시체를 의미한다. 냉기는 죽음이고 열기는 생명이다. 빛, 열, 생명. 이러한 집합의 반대편에는 어둠, 냉기, 죽음 등의 집합이 있다. 이것들을 묶는 것은 유(有)와 무(無)의 분류법이다. 빛의 부재는 어둠이고 열의 부재가 냉기이며 생명의 부재가 죽음이다. 그리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모나드(Monad)에 창이 없는 것이 고독이라면 그런 고독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 외로운 사람은 유(有)를 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인훈씨의 소설, 광장에서 지나가듯이 나오는 고독하니까, 라는 답변들이 터무니없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외로움을 느끼는 인간이란 무엇을 해서라도 부재의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한여름의 무더위가 시작될 때까지 긴소매의 점퍼를 입고 다녔다. 고행이니, 감기니, 여러 가지 이유를 남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꾸며 보았지만, 어쨌건 나는 일종의 노출기피증인 셈이다. 혹은, 잠들기 전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그 나른한 느낌, 내가 좋아하는 그 느낌을, 점퍼를 입고 있으면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한 걸지도 모르겠다. 사춘기의 병적이고도 발작적인 불안과 외로움과 상처 앞에서 더욱 내 개인적이고 사적인 밀실 속으로 숨어들고자 했던 것일지도. 확실한 것은, 긴소매의 옷을 입고서 느껴지는 나 자신의 체온에 나는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주된 이유이건, 부수적인 이유이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는 것만은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다. 어쩌면, 위에서 열거한 것들과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맥락의 이야기일 것이다.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의 체온, 그런 곳에서 난 위안을 찾고 있던 것이다. 그런 식의 감정이 자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는 것 또한 자각하고 있었고, 그런 자각은 간혹 더한 우울과 자괴로 나를 몰아넣곤 했지만, 그래도 긴소매를 포기하기엔…… 추웠다. 사실, 덥지 않느냔 질문을 받을 때에도 내가 하고 싶은 대답은 춥다, 란 것뿐이었다. 종래에는 나약해진 정신이 낳은 환각인지, 늦봄, 내지는 초여름의 날씨에도 가끔씩 몸이 정말로 춥다고 느끼고, 또 불안감에 휩싸여서는 나도 뚜렷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갈구하며, 또 휘청거리며 눈을 감곤 했다.
 
 체온에 육박하는 기온 속에 앉아있을 때면 그런 점퍼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목욕탕에서 섭씨 36도 정도의 온탕에 몸을 넣은 다음, 눈을 감고 몸에서 힘을 빼면 육체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찬가지로, 기온이 36도에 달하는 더운 날이면 자연스러운 상태의 공기 속에 잠겨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체온에 둘러싸여 있는 듯한 착각에 얼마든지 빠져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땀이 조금쯤 흐른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심리적 안정감만 얻을 수 있다면, 햇볕이 아무리 따가워도 괜찮은 것이다. 그늘에 앉아있는 것도 나쁘진 않은 일이다. 그런 면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름의 무더위만 오면 그토록 찾는 현대 문명의 축복, 각종 냉방기기들이야말로 나에게는 적이었다. 냉방병에도 곧잘 걸리는 나의 튼튼하다고는 못할 몸도 몸이지만, 냉방기기가 만들어낸 인공적인 추위에 갇혀 있다보면 마치 안도현씨가 읊고 박경찬씨가 노래부른 추운 도시를 실감하고 있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혀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확실히, 봄이 왔으나 세상은 아직 춥다는 외침은 공허한 것만은 아니고, 또 그런 인공의 추위를 느끼는 사람들을 단지 도시에 적응 못한 낙오자라고 치부하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추위는 진정한 자유주의, 개인주의는 어느 결에 상당부분 소실되어 버린 것을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누군가 이 글에 공감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일 것이다, 라고 막연히 상상해보고 있다.
 
 그런 추위를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 틈에 낄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래알 군중, 고독한 군중이라는 이야기가 괜한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는 소실된 개인을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느낄 수 있다. 군중 속에서는 추위를 벗어나기는커녕 군중이 내뿜는 열기에 자신의 체온까지 빼앗기는 기분이 들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2002년 월드컵이다 뭐다 해서 한창 시끄러울 때에도 멍하니 집 소파에 누워서 미친 듯이 소리지르는 군중들을 묘한 쓸쓸함을 느끼며 TV로 보고 있을 뿐이었고, 학교 여행을 가서 장기자랑이나 캠프파이어를 할 때에도 어울려야만 하는,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과 휩쓸리기 싫은 마음 사이의 괴리 때문에 어색하기만 했다. 중앙에서 타오르는 캠프파이어의 열기에 취한 사람의 무리들. ― 사람들이 아니다. 무리일 뿐이다. ― 느껴지는 열기는 사람의 체온이 아니라 군중의 광기가 만들어내는 열기일 뿐이었다. 열띤 헐떡임, 미친 듯한 외침, 광신도, 웃음, 울음. 사실 그런 실망 아닌 실망을 겪기 전부터 그런 현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을 테지만. 그런 집단의 광기 안에는 어설픈 개인주의자가 설 땅은 없는 것이요, 그런 사람은 애초에 그 속에 서있을 수가 없는 종자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미칠 수는 있어도 집단적인 광기에 취하는 것은 끝내 거부하는, 골칫덩이 고집쟁이인 셈이다.
 
 숱한 소설은, 시는 그런 골칫덩이, 외로운 사춘기 소년을 말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아이의 모습을, 사춘기의 모습을 안고 있다.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요원한 일이고, 또 그런 것이 필요한 일일지도 생각해볼 문제다. 하지만, 분명 그래야 할 터인데 마치 그런 사춘기는 이미 멸종한지 오래라는 듯이, 내 주위는 온통 여자아이들 중 누가 예쁘니, 어느 사이트가 어쩌니, 어느 게임이 재미있니, 어느 축구 선수가 잘하니, 하는 소리 밖에 할 줄 모르는 아이들로 메워져 있었다. 소녀들 쪽은 잘 모르겠다. 함께 지내본 적이 거의 없었고, 같은 학교 안에서도 아는 아이를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내 인간관계가 좁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쪽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을까. 여하간, 내가 접촉하는 소년들의 경우 진지한 태도로 하는 이야기는 대개는 정치나 대학에 관련된 이야기가 대부분으로, 그렇게 주위는 온통 현실주의자들로 숨막히게 들어차 있었다. 사춘기 소년이란 것은 이미 기록에나 남아있고 이젠 거의 멸종해버렸는지도. 또는 저 깊은 곳으로 숨어서, 아이들의 외부엔 드러나지 않고 있는지도. 하긴, 사춘기 소년은 수줍음이 많다니까 아이들의 저 마음 속 깊은 곳에 틀어박혀서, 조용히 자신이 괴사 당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서 그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는지도, 사실은 아이들은 혼자 있게 되면 떨어지는 꽃잎에 감상적이 되고 외로움에 떨고 있는지도, 그럴 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쓸쓸한, 그리고 또 씁쓸한 이야기이다. 나처럼 대놓고 휘청거리는 것보다 더 힘들 테니까 말이다. 조금만 더우면 에어컨디셔널을 불만스런 목소리로 외쳐대는 현대의 아이들이지만, 그래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주위에서 요구하는 수많은 현실들 속에서 그렇게 강하게 자라났는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거짓에 지쳤다면서 온갖 강함을 던져버리고 나약만을 끌어안은 사람과는 달리. 짝사랑을 하면서도 부모님과 학업 때문에 사귀려는 생각도 할 수 없다는 어느 아이의 말에서, 그리고 시험 공부를 하다가 별안간 울면서 나무에 주먹을 쥐어박는 어느 아이의 모습에서 그런 흔적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설령 현대의 청소년이란 것이 과거의 사춘기 소년에서 현대 사회에 맞춰 진화한 결과라고 해도, 그들의 모습에 그들 조상의 모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어렴풋한 모습 밖에 찾을 수 없는 진화라는 것 또한, 쓸쓸하고도 씁쓸한 일이지만…….
 
 자연이 체온의 착각을 주는 철이 지나가면 난 또 점퍼와 제 체온에 기대어 버텨나가고, 인간에 대한 갈망을 견뎌 나갈 것이다. 어리석은 위안일지언정.
 
 우리는 고독이 적이 아님을 안다. 고독은 양날의 칼이라, 우리 스스로 그것을 감당할 힘이 없을 만큼 지쳤을 때는 우리를 짓누르지만, 또한 우리가 고독을 짊어지고 있기에 우리는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독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사랑하는 것이 사랑 받는 것보다 낫다고 말테의 수기에서 말하였다. 그렇다, 영영 사랑 받지 못하더라도 사랑할 수만 있다면 아직은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다. 고독한 짝사랑이건 뭐건. 그러나 살아가면서 우리가 품어왔던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 희망은 계속해서 끈 끊어진 연처럼 추락해버리고, 그런 실망은 끝내는 절망으로 이어져버리기도 한다. 희망의 부재, 절망에 가까워진 지친 상태에서 고독은 외로움이라는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 되어버리고, 그럴 때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고전적인 명구를 다른 의미에서 되새겨본다. 그것이 체온을, 인간을, 동종을 갈구하는 의미이다. 그런 상태에서 별 부담 없이 기댈 수 있는 대상 ― 친구라는 형태이건 가족이라는 형태이건, 그런 사람이 곁에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는 기뻐해도 좋은 일이다……. 우리가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처럼 온전하게 접근하지 못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건 어떻건 간에,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열원이 있다는 것, 그것은, ― 설령 그것이 가벼운 위안으로 보일지라도, 인간이여, 그대는 위안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 그래, 여하간에 좋은 일인 것이다. 그러니 인간을 갈망하고 체온을 갈망하고 부재를 두려워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비웃지 말지어다, 인간이여. 지친 사람의 나약함을 비웃지도 말을 일이다. 그런 사람은, 많은 짝사랑을 했고 또 많은 희망을 품어왔기에, 그만큼 많은 것에 지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