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내가 노동자연대(다함께)와 맞지 않는 이유

공현 2015. 2. 20. 03:36




내가 <노동자연대(구 다함께)>와 맞지 않는 이유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강조하자면, 제가 <노동자연대(구 다함께)>와 '맞지 않는' 이유입니다. 즉 저라는 인간형과 그 단체 사이의 궁합 문제랄까, 그런 이야기인 것입니다. 제가 굳이 그런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노동자연대>가 하나의 유형을 대표하는 단체가 될 수 있으며 제가 거기에 맞지 않는 이유를 이야기하는 것이 저를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20대가 되고, 또 대학에 오고 난 직후에, 나에게 가장 열심히 홍보를 해온 조직은 <노동자연대>였습니다.(그때는 <다함께>였죠.) 집회에도 같이 가자고 했고, 포럼도 오라고 했고, 신문도 사서 읽으라고 했죠. 그런 적극성은 참 중요한 자세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고, 다른 단체들도 본받을 면이 있습니다. 너무 부담스러운 감도 없진 않았지만요. 뭐, 여하간 그렇게 꽤 오랜 기간 권유를 받았고, 그 이후에도 몇 번 오며가며 <노동자연대> 활동가들과 접했지만, 저는 '맞불'(지금은 '레프트21'이죠?) 1년 구독을 할지언정 <노동자연대>에 가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물론 제가 청소년운동을 계속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좀 더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저는 <노동자연대>가 정답주의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가까이 하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 <노동자연대>는 참으로 명쾌합니다. 어떤 이론에 근거해서, 세계를 해석하고, 올바른 앎에 기반을 두고, 올바른 답을 제시하며, 그 답대로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어떨 때는, 노동자연대의 정치적 사안에 대한 언어는 윤리적인 것으로까지 느껴집니다. 그러한 명료함, 때로는 단순함은 여러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 같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영 맞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함께 만들었던 간행물(무크지라고 해야 할지...) 이름이 '오답 승리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 자신에게 굳이 무슨 '주의자'라는 말을 붙인다면, 청소년주의자이거나 아나키스트이거나 오답주의자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오답주의'라는 것은, 말하자면, 세상에서 상식이고 정답으로 인정된 것들에 대해 반기를 들고 다른 답과 가능성들을 발견하고 이야기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답주의자는 자신의 답조차도 정답의 자리에 올리려 하지 않고, 오답일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유보하고 회의하며 절대화하지 않는 것이 '오답주의'입니다. 에 뭐, '상대주의'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건 무슨 철학적 인식론이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나 정서에 가깝습니다. 참 삐딱하죠. 그런 삐딱한 태도가 저라는 인간의 근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노동자연대>나, 아니면 다른 비슷한 정서와 태도의 활동가라면 자신들이 보편적으로 더 나은 세계를 위해 노력하며 이를 위해 올바른 주장과 활동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별로 그런 믿음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바라는 세상, 저라는 인간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 제 욕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동의를 구하거나 묻지요. '저는 이런 세상이면 더 제 마음에 들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떻습니까?' 다행히도 그런 제 욕심과 희망사항이 다른 사람들의 것과 일부라도 겹치는 게 있는지, '운동'이 성립을 합니다. 그거 참 다행스런 일이긴 하지만, 그 사람들과 제가 온전히 뜻을 함께하고 있다고까지 믿지는 않습니다. 설마 그런 형편 좋은 일이 있을라고요. 저는 보편적인 정답(진리)이 단지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쪽이니까요. 그래서, 그들이라면 "마땅히 이래야지"라고 말할 일을, 저는 여러 가정법을 붙여가면서 "나는 이러길 바란다"라고 하고 제 감정과 이익에 대해 말하곤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정답주의적인 활동가들이나 저나 별로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가령 정답주의적인 사회주의 활동가가 여러 운동들을 좌파적이냐 노동자계급 편이냐 아니냐라는 기준으로 나누듯이, 저 역시 청소년운동이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지요.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그것이 오직 저의 기준이거나 청소년운동이라는 특수한 위치의 기준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답주의적인 활동가라면 그것이 보편타당하고 세계에 바람직한 관점이라고 생각할 거라는 점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청소년활동가들이 싫어할 일, 청소년운동이 반대할 일이, 곧 마땅히 해선 안 될 일이거나 당연히 고려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이렇다보니까, 그런 성향의 활동가 분들과 제가 대화를 하다보면 이야기가 자꾸 미끄러지지요. 문제를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다르니까요. 저는 오히려 옳은 답을 피하면서 '의미있는 답들'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사실 그건 순전히 논리만 따지면 저한테 유리한 논쟁일지도 모릅니다. 그분들은 보편타당한 옳음을 논증해야 하는 반면, 저는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말입니다. 여하간 그렇게 미끄러지는 게 자꾸 느껴져서, 저는 문제의 전제와 태도 자체가 다른 분들과 토론을 통해 올바른 답을 함께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러한 의미의 올바른 답이란 게 없다고 봐서일 수도 있겠습니다.




과거에 들었던 페미니즘 수업에서 교수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예전에 강의를 하다가, "세계가 너무나 명료한 사람은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더랩니다. 그때 한 학생이 네 음절로 답하더래요. "보.수.반.동".

제 가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또 정답주의적인 분들이 세계를 항상 명료하게 느낄 거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기보다는 그런 명료함을 지향하고, 바란다고 보는 게 더 사실에 가까운 표현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들은 애초에 서로 희망하는 것 자체가 다른 셈입니다. 뭐, 그것 또한 각자의 답이고 오답이지요. 하하.

그렇지만 저는 또 정답주의의 밑바탕에 있는 욕망, 희망을 드러내고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명료한 정답과 세상을 해석할 보편타당한 관점을 바라는 것은 어떤 사회적 배경에서 자라나는 욕망일까요? 올바름에 거부감을 느끼는 인간과 올바름을 갈구하는 인간 사이의 차이는 어떤 것이며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참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추신. 그렇기는 한데, 우리가 결국 운동을 단기간 안에 크게 만들고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대중조직 같은 걸 만들기 위해서는 명료한 언어가 필요한 것일까요? 명료하지 않고 삐딱한 채로 많은 이들을 모으는 것이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요? 필요하다면 저도 믿지 않는 것을 진실인 양 말하는 거짓말을 못할 것은 없는 것이 또 저란 사람입니다만, 만약 그래야 하다면 제법 슬픈 일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