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생일

공현 2015. 3. 7. 00:28

옛-날 한 10년 전에 썼던 글









생일

 

 나는 생일을 1년에 3번은 맞을 수 있는 몸이다. 주민등록번호로는 2월 25일로 되어 있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2월 25일에 축하를 해주곤 한다. 그러나, 사실 2월 25일이란 음력으로 올린 생일이라, 양력으로 하면 4월 11일이어야 맞다. 그래서 가족들 같은 경우 4월 11일로 해준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 중 일부는 음력으로 2월 25일인 날로 해주기도 해서 생일을 3번이나 맞이하는 사태도 가끔은 일어나는 것이다.

 

 생일이란 것은 어릴 적부터 뭔가 굉장한 것처럼 느껴지는 무언가인 걸까. 여하간 내가 태어난 날이니 어쩌니 하는 것보다는 뭔가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친구들도 초대할 수 있고 선물도 받을 수 있는 날이라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생일에는 대체 뭘 한단 말일까. 생일이 대체 뭔데? 부모님들은 내게 생일이라며 친구들을 초대하라고 말하곤 하셨지만, 왜, 누굴 초대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조금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태어났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마냥 기쁜 일이 아니므로 생일에 축하만 하는 것은 부당한 것 같다는 결론을 낸 적이 있었다. 제법 오래 전 일이었던 것 같다. 여하간 슬픈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으니까 누군가는 위로도 좀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생일에 축복을 해대는 것은 삶에 대한 자기 암시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어서 즐거워, 좋아, 기뻐." ... 그런 자기 암시는 오히려 삶에 힘든 점도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지도 모른다. 생일이라는 하루 동안 존재를 축복함으로써 인생의 부정적인 면들을 외면하려는 걸지도.

 

 부모들이 "난 너를 낳아서 기뻤어."라던가, "넌 왜 태어났냐."라면서 축하나 저주만을 고집하는 것은, 결국 자식의 입장에서 고려해주려는 의지가 별로 없는 태도다. 애초에 부모들도 종종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러고보면 걸리버 여행기에서도 릴리프트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부모들이 자식을 멋대로 낳은 것이므로 자식들이 부모에게 낳아준 것을 감사할 이유가 없다는 식의 논리가 등장한다.

 얼마 전에는 생일에 대한 독특한 견해와 만날 수 있었다. "선물할 구실, 축하할 구실, 표현할 구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언젠가 우연히 같은 책이 두 권 생겨서 그 책을 다른 사람에게 팍 선물했다가 "구실 없는 건 부담스러워서" 라면서 거절당한 적이 있는 나로서는, 동감하고 싶어지는 해석이긴 하다. 그러나 왜 사람들은 일상적인 선물에 당황할까. 날짜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주고 싶어지면 줄 수 있는, 그런 게 아무래도 편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일이기에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해서 주는 것" 쪽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래도, 거절당하는 일도 있다. 슬픈 일이지만. 상처 받아도 상처 받지 않는 척 하는 것 정도는, 누구나 다 습득하고 있는 위장술인가?)

 

 대체 "내가 태어난 날"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내가 태어난 날은 단 하루뿐이다. 다른 날들은 그저 날짜라는 반복되는 숫자 놀음의 결과물일 뿐. 시간이란 계산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 문화를 지닌 사람들은 1년마다 돌아오는 생일이란 개념을 아예 생각지 않는다고 한다. 지구가 한 바퀴 돌았다는 '과학적' 설명에는 그래도 같은 자리는 아니라는(지구가 그 공전 중심으로 삼고 있는 태양도 운동하니까.) 역시 '과학적'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사실은 양쪽 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생일을 마냥 축하하기에는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것 같다. 삶이 뭐기에! 죽음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죽는다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에 비해 정말로 안 좋은 상태인지는 영 모르겠다. 나는 죽으면 내세 같은 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만일 내가 그 소망을 별 근거 없이 믿는다면 죽음이란 것은 아예 없어지는 것이니까 어찌보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는 것 아닌가? 특별히 죽음 쪽을 택할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삶 자체를 무조건 긍정해야할 가치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울지 않고 악기를 연주하며 즐겁게 노래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대체 왜 힘겹게 죄를 지어가면서 삶을 이어가는지 우리는 회의할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가 철이 들어있을 때, 우리는 이미 살아있었다. 어쩌면, 그것 뿐이다.



 "우리는 도중이야."

 (중략)

 "아마 어디에 있더라도 마찬가지겠지. 무한의 암흑밖에 존재하지 않는 항성간 공역의 절대진공 속이라도,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평범한 인생 속에서도 틀림없이 어디라도 마찬가지야. 다들, 도중에 태어나서 어중간하게 살다가 도중에 죽어가지. 자신들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정확히 알 수도없어. 하지만."

 그는 반쯤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하지만 나머지 반은 결코 무릎 꿇지 않을 것 같은, 모순을 안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그의 입가에는 될 대로 되라는 듯한, 그렇지만 힘찬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중략)

 "우리에겐 아무 것도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한 게 있어. 우리는 이, 우리가 어중간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긋지긋하지. 그럼 어중간한 게 싫다면 발버둥을 쳐서라도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는 얘기지."

(카도노 코우헤이 지음, 나이트워치 시리즈 3-너는 허인과 별에서 춤춘다

(김지현 옮김, 대원 CI)中)


 이런 불성실한 기분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내 생일을 그다지 축복하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의 생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태어났다는 것이 정말 기쁘다. 진심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축하를 해주기에는, 좀 이기적인 것 같지 않은가? 내가 기쁘다는 것, 내가 그 사람을 원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는... 여하간 나는 그저 하루하루가 소중할 뿐이다. 생일이 좋지도 않다. 하루를 소중하게 여길지언정 그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내가 살아간다는 것 때문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살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희망.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 같다. 애초부터 땅 위에 길이란 없다."(루쉰) 비관적인 나로서는 삶이란 길도 보이지 않으며, 마치 검은 밤의 가운데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현실 상황이라거나 그런 것에 관계없이 말이다. 마치 눈을 감고 나 자신과 내 주변과 일상을 들여다볼 때 느껴지는 그 위태로움, 세계라는 것의 허위, 근거 없는 그런 '느낌'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희망을 만들어보려고 해본다. 아직은 젊으니까 발버둥치는 거다.

 

 만약 생일을 축하하는 게 삶을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라면, 결국 생일문화가 지향하는 이상은 생일축하가 필요없는 세상일 터이다. 굳이 생일축하 같은 걸로 자신을 긍정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거의 매일매일이 삶을 긍정할 수 있을 만큼 충만한 세상 말이다. 그런 점에서 어쨌건 생일문화는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 작위다.

 

 혹시, 죽음은 슬픈 거고 끔찍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생일은 축복해야 할 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주겠다. "이봐이봐, 저기 말야... 당신, 그렇게 삶이 좋다면 매일을 생일날처럼 살면 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