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꿈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지 않겠다'?

공현 2016. 2. 29. 02:28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지 않겠다'?



- 아수나로10주년 자료집 제작과 이사준비와 사업회계결산 등을 하다가 잠깐 쉴 겸...


-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로 억압을 설명하는 것, 또 '가만히 있지 않겠다'라는 말로 저항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나는 왜 그렇게 탐탁지 않게 느껴지는 것일까? 물론 세월호참사와 관련된 해석 틀, 청소년과 관련된 전제, 계몽주의적인 관점 등이 마음에 안 드는 것들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불충분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 가령 사람들의 빈축을 샀던 한겨레 기사(영문도 모르고 30분…항공기 출발 지연된 이유는?(김기성))나, 비마이너와 오늘의 교육에 실린 발달장애인 직업훈련센터에 관련해 나온 장면(안전 책임의 사유화 시대, 발달장애인 공포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①(하금철))은 '가만히 있으라'/'가만히 있지 않겠다' 담론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불신과 불안. 혹은 '진상'. 하금철은 이를 '가만히 있으라' 담론이 사회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과 개인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후자가 사회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가만히 있으라'/'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애초에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안, 보신주의나 가족이기주의에 더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애시당초 세월호참사라는, 누적된 병폐와 구조 속에 일어난 사건을 침몰 순간의 '가만히 있으라'로 표상해버리는 순간 생겨버리는 착시효과.


간신히 시간을 맞췄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8시25분 비행기는 출발하지 않았다. 10여분이 지났을 무렵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안전한 비행을 위해 항공기 서리제거 작업을 마치고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이 작업은 30~40분이 소요될 예정입니다”라고…. 항공기 안전을 위한 조처라는데 ‘감히’ 불만을 표시하는 승객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그러나 한 승객이 승무원을 불렀다. 그는 “비행시간 맞춰 빨리 타라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이제 승객들 다 태우고 항공기를 정비할 테니 30~40분씩 그대로 앉아 기다리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승무원은 “항공기 안전을 위한 것이다. 서리제거 작업은 원래 손님들을 태우고 정비장으로 가서 하는 것이다. 양해해달라”고 대꾸했다. 겉모양새는 친절했지만, 찬찬히 뜯어보니 ‘너희들 안전을 위한 것이니 우리가 하는 대로 가만히 기다려라’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에 듣고 있던 기자도 가세했다. 그동안 세월호 참사를 취재했고 지금도 취재하고 있던 기자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커리어월드 사태를 세월호와 연결하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좀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지난 10월 6일 교육청 관계자와 반대 주민들 간의 간담회 속기록을 살펴보면서 다소 충격적인 문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래는 한 반대 측 주민의 발언이다.

이 사업이 첫 사업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업을 시작하면 끝인가요? 그리고 도로와 인도를 넓히고 제반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갖추어진 상태에서 진행을 하셔야지, 가만있어라, 안전하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 아이들 순진하다, 착하다, 그렇게 말들만 너무 하시는데요, 저는 이거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가 하고 제가 한참 생각을 했어요. 다들 아시죠, 세월호? 똑같아요, 이 아이들. 그 아이들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 아이들 어떻게 책임져 주실 거예요? 세우고 나면 끝입니까, 건물 하나? 이런 의문들만 저는 자꾸 이렇게 질문만 드리는데 그거에 대한 답변을 제가 꼭 듣고 싶네요. (강조는 인용자)

물론 A4 용지 32페이지 분량의 속기록에서 세월호라는 단어는 위 인용된 문장에 딱 한 번 나올 뿐이다. 그러나 저 문장이 어쩌면 주민들의 반대 움직임의 기저에 흐르는 핵심적인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 조금 더 나아가서, 내가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로 억압을 설명하는 것이 불충분하다 느끼는 이유는 아마 이것 같다. 이미 우리 사회의 억압과 통제는 사람들을 가만히 있도록, 정지 상태로 순응하도록 만드는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이미 바뀌어 있거나.) <피로사회>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등을 통해서 우리는 그런 논의를 진전시켜오지 않았던가. 사회는 우리에게 '가만히 있으라'라고 하지 않는다. 자기를 긍정하며 스스로 더 움직이고 자기를 착취하라고 하고, 자유롭게 자기계발을 하라고 요구한다. 이미 사람들은 정말이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물론 사회는 틀 속에 사람들을 가둬놓고 그 안에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틀 자체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있지 말고 '자발적으로' 뭐라도 하라고.


- 그런데 '가만히 있으라'/'가만히 있지 않겠다' 담론은 이런 논의를 싹 잊어버리고 다시 단순한 억압-순응과 주체-저항(또는 자유)의 구도로 문제를 돌리는 듯하다. 문제는 가만히 있느냐 가만히 있지 않느냐가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욕망하고 조직하느냐. 어떻게 가만히 있고, 어떻게 가만히 있지 않느냐. 그러므로 가만히 있는 것은 꼭 문제가 아니다. 어떤 때는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좋다.


- 만약 운동이 '가만히 있으라'/'가만히 있지 않겠다' 담론을 주된 언어로 삼는다면, 그것은 결국 '투표해라', '능동적 자발적 주체적 개인이 되어라'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행동해라'라는 수준의 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붙어 있는 청소년과 교육에 대한 얄팍한 이해는 차치하고서라도. '가만히 있으라' 운운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런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