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

엄기호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와 '사랑과 난입' 비평

공현 2016. 6. 15. 21:24


엄기호 씨가 경향신문 칼럼 <사랑과 난입>을 두고 일어난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밝히며 경향 칼럼 지면에서 하차할 것을 밝혔다. 논란이 된 글들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비평해보고자 한다.




- 최근에 엄기호 씨의 경향신문 칼럼 글이 SNS에서 논란이 된 시발점은 <사랑과 난입>이 아니라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082054005&code=990100 였다. 그러니 이 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글 을 읽다보면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학생들의 대화에서 ‘에로스의 죽음’을 떠올릴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글의 방향이 바뀌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일단 그 바로 앞에서 거론된 사례들은, 사랑을 하지 않는 이유로 ▲ 소라넷이라는 범죄사이트, ▲ 남자들이 자기 애인(아마 여성이겠지?)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모습을 보고. ▲ 헤어질 때 '보복'이 두려워서 - 이 세 가지를 말한다.문맥상, 그리고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겪는 두려움이나 걱정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자연스레 우리 사회의 성폭력이나 성별 권력관계가 연애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원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엄기호 씨는 여기에서 독자의 이런 기대를 벗어난다. 그 자체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예상한 대로만 글이 전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문제는 그렇게 기대를 벗어난 글이 설득력이 있느냐다.


"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이 부분을 읽고, 공부를 안 한(롤랑바르트나 바디우나 한병철을 안 읽은) 나는 일단 당황했다. 그런 생각까지 든다.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공부하긴 했는데, 이야기하려는 게 그런 공부가 아닌가보지?" 페미니즘을 연상한 것은 앞부분 사례들이 여성들이 성차별-성폭력적 사회에서 겪는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 후반부의 논지는,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일단 문장 그대로 읽어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이 두려움은 '모르는 낯선 타자'여서가 아니라 '잘 아는데 믿을 수 없는 속이는 존재'여서 생기는 것이다. 그 결과는 사랑이 불가능한 것이요 피로이다.

마지막 문단이 좀 이상하다. 사랑이 도래해야 다시 '위험과 모험'을 감행할 수 있게 된다고 하며, 에로스의 가능성을 발굴하는 것이 시대의 희망이라고 한다.

- 이 대목에서 나는 일단 '위험과 모험'에 "(바디우)"라는 괄호가 들어가 있기에, 음 뭐 나는 잘 모르는 바디우의 특수한 개념인가보군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부분에 불쾌해했다. '사랑이 없어서, 위험과 모험을 감행하지 않아서 문제란 말인가. 여성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말하지 않으면서 위험과 모험을 감행하고 에로스의 가능성을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 대체 무슨 결론이란 말인가.'


글의 흐름상 기대했던 성별권력 등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되었다. 엄기호 씨를 신뢰하는 독자라면 엄기호 씨가 그런 문제점들을 이미 전제한 상태에서 생략했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이 그럴 법한 것은 아니다. 그럼 생략하고나서 한 이야기가 그 빈틈을 채울 만큼의 충실함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엄기호 씨의 글은 롤랑바르트, 한병철, 알랭바디우를 거론한다. 그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주제의식 자체가 수수께끼로 남는다. 이 상황에서 비롯된 실망감은 필자가 사례들에서 뻔히 들여다보이는 젠더 문제를 외면하려고 한다는 해석까지 낳는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이 글이 매우 짧은 지면에 한정된 일간지 칼럼으로서 적절한 주제 선택이 아니었다 평가한다.





- <사랑과 난입>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292059005&code=990100 은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의 바로 다음 칼럼 연재 차례에 게재한 글이다. 따라서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가 비판받았던 점을 염두에 두면서 만회하기위해 썼을 것이라는 추정도 해볼 수 있다. 엄기호 씨가 SNS 상의 반응들을 얼마나 신경쓰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일단 이 글이 이전 글 결론부에서 이야기한 '에로스의 가능성 발굴'이라는 이야기에 이어지는 이야기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두 개의 글을 이어놓고 읽어야 비로소 엄기호의 이야기가 이해가 가는 면도 있다.


일단 <사랑과 난입>의 주제의식은 명료해 보인다. 글의 구조를 요약해보면 이렇다. ( ) 안은 나의 부연이다.


 1) 가부장적인 관계의 어느 부부(성화 부모님)가 있었다. 참고 살던 아내가 남편에게 문제를 고치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선언한다. 이것이 '난입'이다. 남편은 이 선언 앞에서 결단을 내리고, 치료를 받으며, 자신이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현재 둘의 관계는 원만하다. '난입'을 통해 '사랑'이 가능해졌다.

 2) 어느 한쪽만 무대 위에 서있는 상황에서 사랑이 가능해지려면 다른 쪽이 '난입'해야 한다. 난입을 통해 비로소 둘이 설 수 있고 둘이 서야 사랑이 시작될 수 있다.

 3) 강남역 10번 출구도 (이와 같은) 난입의 장소이다. (그러므로 여성들이 강남역 10번출구에서 포스트잇을 붙이고 집회를 가지는 것을 '남성혐오'이니 '성별 대결 조장'이니, '폭력적'이니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반응이다.) 이러한 난입을 통해서 사랑이 가능해진다. 당신이 이 난입을 대하는 태도가 곧 '사랑하는 이'를 마주하는 마음일 것이며, 이렇게 난입한 목소리들을 끌어내린다면 사랑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엄기호 씨의 의도는 난입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페미디아의 비판 글 <여성들은 외로움보다 살해가 두렵다>(http://femidea.com/?p=706) 중 "갈등 상황들 위에서도 서로 대화하고 사랑을 통해 화합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겠지요."라는 부분은 오독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사랑으로 극복하자"라는 것도 아니다. 맞서 싸운 결과 사랑이 가능해진 것이다. + <여성들은 외로움보다 살해가 두렵다>에서 무대 자체가 기울어져 있다는 지적은 정당하긴 한데, 애초에 엄기호 씨도 무대에 양측이 모두 올라 있지 않고 일방적인 무대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엄기호 씨 글의 주제는 난입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그것이 에로스의 가능성을 재발굴하는 행동이라고 의미 부여하는 것이다. 이 글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독자들은 이런 주제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엄기호 씨의 글은 일각에서는 화해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읽히는가?

< 사랑과 난입>은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와는 또다른 의미에서 신문 칼럼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앞에서 한 가족 안에서의 사례를 설명하지만, 그 사례는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았고, 가령 '폭력'이라는 단어로 인해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가정폭력을 연상시켰다. 또, 아내와 남편의 갈등과 난입과 변화의 과정은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고, 드라마틱할 정도로 단순화되어 있다.  "아내의 선언 -> 남편의 수용 -> 치료 -> (이혼하지 않고) 닭살 이모티콘을 나누며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됨" 이런 도식으로 읽히는 것이다. <여성들은 외로움보다 살해가 두렵다>가, "가정이 지켜진 것이 행복이라고 묘사하는 듯한" 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관점 문제도 있는데 이건 뒤에 이야기하겠다.)

이 러한 묘사 자체의 부족함에 더해서, 이 사례를 설명하느라 분량의 70%를 할애한 뒤에, 이 사례에 유비시킨 '강남역 10번 출구'에 대한 글은 더욱 설명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는 "섣부른 유비"로 읽힐 수 있다. 1:1 관계인 가족 안의 일을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사건으로 끌고 오려면 더 여러 가지 설명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많은 설명이 생략되고 말았다. 엄기호 씨가 정확히 어떤 유비를 하고 대응을 하려 한 것인지, 추측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게 너무 많다.


이런 한정된 지면의 칼럼으로서의 결점 이상으로, <사랑과 난입>은 근본적으로 관점의 문제를 안고 있다.

"성화 부모님" 사례를 보자. 사실 이 글은 공정하지 않다. 남편(성화 아버지)의 입장에서 깨달은 것을 이야기하고, 인정하게 된 것과, 구원받고 다시 태어난 것을 주로 말한다.

(예 를 들어, 아내의 난입의 결과 남편은 잘못을 인정했지만 결국 오래 몸에 밴 행동을 고치지는 못하고 이혼했다고 하더라도, 아내의 입장에서 이것이 꼭 좋지 않은 해결은 아닐 수도 있다. 애초에 무대 위에 서 있지 못했던 아내의 입장에서는 기울어진 무대를 파탄내는 것도 하나의 길일지도 모른다.)

글의 마무리는 이 글이 남성을 독자/주체로 전제하고 있다는 것은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 강남역 10번 출구를 대하는 당신의 태도가 곧 당신의 ‘사랑하는 이’를 마주하는 마음일 것이다. / 이제 비로소 터져 나오는 그 목소리를 끌어내리는 순간 당신은 이 무대를 독점할 수는 있을지언정 영원히 사랑을 모르는 자로 외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화 부모님 사례에 유비시킨다면, 여기에서 "당신"이 남성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남 성 필자가 남성 독자를 주로 상대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몇 가지 장치가 필요하다. 가령 자신이 염두에 둔 독자를 밝히고, '무대가 기울어져 있음'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사랑과 난입>은 그런 장치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글은 정작 난입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글임에도, 난입의 주체와 의미에는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 그 난입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니 난입하는 주체들 입장에서는 글이 당혹스럽다. <여성들은 외로움보다 살해가 두렵다>가 이 글을 가리켜 "시혜적"이라고 비판하는 이유일 터이다.






- 끝으로, 나는 엄기호 씨가 신문 연재를 스스로 중단해야 할 만한 잘못을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 기준에서는 아니지만, 거기에 보편적 기준이 있는 건 아니다. 나라면 A/S를 할 것이다.)

그러나 엄기호 씨가 두 편의 글을 짧게 한 편으로 말해야 하는 신문 칼럼의 성격에 맞지 않게 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일간지 칼럼 지면은 시의적인 문제를 다룰 때 좀 더 최근 논의되는 것들 속에 있는 글들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다른 논의들의 흐 속에서, 그 흐름을 거스르든 다른 길을 찾든 그대로 따라가며 힘을 보태든, 공론장 속의 하나로 말해야 한다. 시의성 있는 사건을 다루면서도 현재 공론장에서 일어나는 논의와는 맥락이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나는 이번 논란을 보면서, 엄기호 씨가 이번에 논의의 맥락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공부나 사례 연구를 풀어내는 데 다소 욕심을 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