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동창회 가입을 거부하는 데 대한 변명

공현 2008. 2. 17. 09:32

동창회 가입을 거부하는 데 대한 변명

 

 고등학교 3학년 시절도 얼마 남지 않은 때이다. 내가 재학 중인 고등학교의 동창회에서 1만 원씩을 내라고 하고 있다. 동창회 가입 명목이라고 하던가. 나는 그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그 돈을 내지 않겠노라 다짐했으며, 지금은 한 발 양보해서 돈을 내더라도 적어도 그 돈을 냄으로 인해 내 이름이 동창회 명부에 오르는 일만은 거부하겠노라고 굳게, 굳게 다짐하고 있다. 공동체의식이 부족하다든가 혼자 튄다든가 모교를 우습게 안다든가 하는 식으로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나 나는 나의 어설픈 생활 원칙과 알량한 기분을 위해서 그 돈을 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다.


 그놈의 원칙이 대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업무상의 경우를 제외하면 내가 사람을 사귀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얼마나 마음이 맞는지, 얼마나 친한지, 얼마나 그 인격이 좋은지와 같은 것들이라는, 대단히 간단한 것이다. 따라서 지인(知人)들에 대한 나의 심리적 거리에 이런 기준들에 의해 차등이 생기는데, 단순하게 말하자면 친구 아닌 지인과 친구로 사람들이 분류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는 사람들도 꽤 많긴 하다.) 이 원칙의 무엇이 동창회와 충돌하는지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꼼꼼하게 ― 또는 깐깐하게 정신을 챙겨가며 살려는 사람이 동창회에 가입하는 것은 사실상 나의 지인들이라는 집합에 ‘동창’이라는 새로운 부분집합을 만드는 것이며 이 동창이라는 부분집합의 기준은 같은 학교를 나왔는지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그러한 기준을 추가할 하등의 이유를 느끼지 못하며 같은 학교를 나온 사람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내 마음 속의 친소(親疎)에 따라 대할 따름이다. 고로 나는 친구를 소중히 여기지만 동창을 소중히 여기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친구를 차별화하는 효과도 있는데, 아무래도 동창이라는 집단을 내 마음 속에 형성시키게 되면 친구에 대한 충실함이 아무래도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뿐더러 내 원칙을 훼손시키는 듯하여 상당히 기분이 찝찝할 듯하다.
 이 원칙은 프롬이 『건전한 사회』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 소외 현상에 대한 내 나름의 대응이다. 나는 내 인격적인 면이나 개인적인 부분을 사회적 지위나 상품으로서의 가치에 팔아버리지 않을 것이며 그런 경향에 대항하여 내 내부에서부터 싸워나갈 것이다. 대학교에 자기소개서를 내면서도 그렇게 끙끙거린 이유는 나라는 상품의 카탈로그를 만드는 일 같았기 때문이었다. 실로 구닥다리 사고방식이며 살아남기 힘든 방식일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것이 나 삶이며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으니. 너 자신이 되어라, 아멘.

 따지자면 내가 동창회 가입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은 모 선생님의 발언 때문이었다. 그 선생님께서는 수업시간에 동창회비 1만 원을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것보다 더 많이 내는 사람들도 많다든가, 동창회 운영에 3천만 원이 넘게 든다든가하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은 나중에 가면 동창들이 다 사회적 재산이기 때문에 1만 원은 투자로 생각하라는 데였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성격이 비뚤어진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가입하지 않겠노라고 한층 더 다짐하게 되었다.
 이는 나의 원칙과도 관련이 깊은 이야기인데, 나는 지금까지 내 이익을 고려해가며 친구를 사귀어본 적은 없으며 앞으로도 없게 하고 싶다. 그리고 꼭 친구가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업무상, 사무상의 관계가 아니라면 인간관계를 이익이나 도움 같은 것을 생각해가며 맺을 생각은 없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에 동창회에 나오라는 주장은 나 같은 이에게는 실로 모욕적인 말이다.


 나도 나중에는 동창회가 아쉬워질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나약해져서 뭔가 도움 줄 만한 곳을 찾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일 것이며, 또 나는 내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젊은 혈기와 몸에서 끓어오르는 신념에 힘입어 싹을 잘라놓는 게 나을 것이다. 후에 가서 연락 끊긴 친구의 연락처를 찾고 싶어진다거나 하면 다른 친구를 통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상당히 낙관적인 녀석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돈은 내고 동창회에 안 들겠다는 것은 내가 담임 선생님 등과 지은 타협인데, 남들은 가입비로 돈을 낼 때 나는 가입을 안 하기 위해 돈을 내는 셈이니 뭔가 좀 억울하긴 하다. 사치스럽다. 안 그래도 이래저래 벌이는 일 때문에 금전적 압박이 심한데... 한숨을 조금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