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이웃 거미 씨

공현 2008. 3. 17. 09:35



이웃 거미 씨

(2006.08.)

  내 기숙사 방 바로 앞에는 커다란 거미 씨 세 명이 집을 지어놨다. 잘 눈에 띄지 않는 이웃들이다. 처음에는 잘 모르고 거미집 일부를 건드려서 부숴버리기도 했다. 주로 벽 쪽에 붙어 있는 거미1(편의상의 이름) 씨의 집을 부수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나와 거미1 씨 둘 다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한두 번 그러고 난 후에는 거미1 씨의 집을 파악하고 움직이다가 거미2 씨나 거미3 씨의 집을 부순 적이 있는데, 그 부분은 그쪽에서 타협을 보았는지 언제부터인가 내 머리에 안 닿는 위치로 옮겨져 있었다. 만일 거미 씨들이 없어지기 전에 내 방에 올 일이 있다면, 그 집이 어떻게 절묘한 대각선으로 배치되어서 내 통로를 만들어 주고 있는지 관찰하시기 바란다.


  사람들은 흔히 실내나 자기 거주공간 근처에서 거미집을 보면 부숴버리기 일쑤이다. 거의 사람의 실제 생활공간인지 어떤지도 의문스러운, 방 모서리 구석진 곳에 지어둔 거미집까지 눈에 띄면 부숴버린다.

  거미집 부수기…. 내 생각에는, 얼마 전부터 기숙사 현관에 붙어 있는 안내문 내용과도 유사한 문제인 것 같다. 그 안내문은 한 마디로 그리마의 종에 속하는 자를 보면 잡아죽이라는 소리였는데, 거기 써있는 게 참으로 이상해보였다. 그리마는 해충이라 할 수 없고 어쩌면 익충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모습이 사람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기 때문에 보이면 죽이라던가 뭐라던가. 보기 싫다고 그냥 죽여도 된다니…. 좀 지나치게 폭력적인 세계관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혐오감을 느껴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발로 팍 밟는 거는, 그래, 용납하긴 어려워도 심정적으론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예 명시적으로 보이면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를 써놓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리마 정도라면, 되도록이면 안 죽이고 공생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나는 거미 같은 자들과도 되도록이면 공생을 해야 한다는 그리 투철하지는 않은 신념을 표방한다. 나의 생활이 다른 개체와 충돌하는 일은 살다 보면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나는 나의 생활을 관철시켜 다른 개체의 생활을 방해하고는 한다. 항상 그런 건 아니고 내 쪽에서 양보를 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나도 내 생활을 그리 쉽게 양보할 순 없으니깐. 그러나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영역도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내 기숙사 방문 앞에 집을 지어놓은 거미 씨들과의 공존 조건은, 그 거미집들이 내가 방을 드나드는 것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거미 씨들은 자기 집을 옮겨서 지을 수 있지만 나는 기숙사 방을 옮길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거미 씨들보다는 힘이 강한 강자인 내가 내건 내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나도 약간 허리를 굽히고 들어간다거나 술을 마시고서도 벽 쪽에 있는 거미 씨들의 집을 부수지 않도록 조심하며 신경쓰는 정도의 양보를 하고 있다.


  나는 만일 충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공존하고 싶다. 세상을 공존과 타협만으로 살아선 안 된다. 그리고 세상을 충돌만으로 살아서도 안 된다. 신념과 똘레랑스의 그 모호한 경계선을 고민해봐야 할 때는 많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계속 고민하고 대응방식을 선택해나간다. (그런데 적어도 나는 미적인 문제를 다투는 자리가 아니라면 외관에 대한 혐오감을 신념의 영역으로까지 봐주고 싶진 않다. 이것도 내 아집일까나?)

  이용악 씨의 낡은 집이라거나 이육사 씨의 교목 등 일반적으로 시에서 거미줄은 죽음의, 버려진, 쓸쓸한, 을씨년스러운 이미지라고 하지만, 내 방문 앞에 쳐둔 거미 씨들의 집을 보면 꼭 그런 느낌이 들지만은 않는다. 그냥 살아가고 있다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우리는 서로 특별히 간섭하지 않으면서,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