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

여성주의 저널 앤 창간호에 바치는 비평

공현 2008. 5. 27. 02:23
모두에게 고민거리들을 던져줄 수 있는 언론이길 바라며
여성주의 저널 앤 창간호에 바치는 비평


윤종

군사주의 비판과 여성주의라는 조합에 대해

 “여성주의+병역거부는 참 최악의 조합인 듯”
  모 대학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 ‘병역거부, 군사주의, 그리고 여성’에 대한 세미나 홍보 글에 달린 댓글 중 하나다. 병역거부만으로도 온갖 욕을 먹는데, 거기에 여성주의라니! ‘사회부적응자’들과 ‘꼴페미’들이 합쳐지는 것에 불편해하는 마음을 참으로 간명하게 드러낸, 쓴 웃음 주시는 댓글이 아닐 수 없다. 오, 이런.

  그리고 그런 ‘최악의 조합’을 성공회대 여성주의 저널 n[앤]이 창간호(통권2호)에서부터 들고 나왔다. 누군가에게 ‘최악’인 조합은,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조합이 되기도 한다. 일상이 자명하고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 군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인용한 댓글에서는 “병역거부”로 표상되는)와 여성주의의 만남이 ‘최악의 조합’이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것이 가장 당연시되어온 일상의 부분들에 도전하는 것이며 그것을 해체­재구성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병역거부를 고민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교육제도에 배어 있는 군사주의들과 늘상 접하는 한 청소년인권운동가로서, 또한 여성주의나 군사주의 등에 대해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학내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한 대학생으로서 앤이 창간호 기획으로 군사주의를 잡은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었다. 형식적 수사나 아부로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앤이 그 주제 선정에서 여성주의 언론으로서 당연시되어온 일상을 불편하게 만들고 한편으로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내려는 용기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앤의 군사주의 기획에서 다소 아쉬웠던 것은, 몇몇 부분들이 다소 군대에 대한 상투적인 이미지에 기대어서 쓴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예컨대 실제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거나 하면 군대는 학벌이나 ‘빽’ 등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앤의 글에서는 “사회에서는 그렇게 쉽게 통용되던 연령주의와 학벌주의조차도 그 틈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고 있는데, 나는 이런 느낌의 서술들이 군대와 사회를 분리시키며 군대를 특수한 공간으로 규정하는 군대에 대한 상투적인 이미지에 의거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군사주의에 대한 논의를 군대에만 한정짓거나 군대 경험에 대한 것으로만 해서는 안 되지만, 오히려 그러기 위해서라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일상 속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 이런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의 비중을 높인다면 글의 필자들의 경험들이 중복되는 부분을 줄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렇게 쓰고 창간호를 다시 보다 보니 “여성주의가 경험주의에 포위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보였다. 아하하-ㅅ;; 궁색한 변명을 하자면, 여성주의가 경험주의에 포위되어서는 안 되지만, 모든 정치의 한 근간이 사람들의 실제 ‘경험’인 건 부정할 수 없다.)

  군사주의, 평화 같은 개념들을 군대, 전쟁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두루 존재하는 것으로 사고하려는 시도, 그리고 여성주의의 문제의식과 연결하려는 시도는, 앤 창간호에서 권인숙 씨가 말한 것처럼 그 역사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디 보자, 외국까지 합치면, 그게 기껏해야 20여년 정도인데 ― 응? 20여년?! 20년이라는 시간은 분명히 ‘여성주의의 역사’라거나 ‘근대’라거나 ‘군대의 역사’ 같은 큰 시간의 틀에서 보면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실제 우리들의 삶에서 보면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다. 나만 해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산 시간이 20년인데, 군사주의에 대한 연구는 나보다도 오래되었다. -_-!
  2, 3년 전부터 군사주의 문제와 군사주의+여성주의의 문제를 얄팍하게라도 접해오거나 고민해온 나 같은 사람한테 앤 창간호의 이야기는 조금은 식상했고, 그래서인지 군사주의 기획보다는 밤거리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성공회대의 다수 독자 분들에게 앤 창간호의 내용이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다. 막연하게 느껴오던 군대―병역―군사주의에 대한 불편함을 구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을지, 전혀 모르던 새로운 이야기를 접할 기회였을지, 불편해하면서 “여성주의+병역거부는 참 최악의 조합인 듯”이라고 뒷담을 까고 있었을지, 혹은 나처럼 다소 식상한 이야기라고 느끼고 있었을지…. 군사주의와 평화의 문제에 대해, 좀 새롭거나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들을 기대하며 앤 창간호를 펼쳤던 나의 과욕일까?
  앞으로도 이러한 불일치는 계속될 것이다. 숱한 여성주의의 문제들을 다루다 보면, 정말 몇몇 새로운 주제들을 제외하면 많은 것들이 그 전에 여러 번 이야기되어 온 주제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아주 새롭게 받아들이거나 불편해하는 사람들과, 그런 이야기들을 이제는 식상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독자층의 이러한 불일치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인데, “운동가는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앤은 같은 말을 기꺼이 반복하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반복하거나, 아니면 다른 말을 생산해내는 길을 택할 것인가?



여성주의 언론운동의 임무 (<-군사주의적 용어?)

  그래서, 여성주의 저널이란 무엇인가? 혹은 대학 안에서의 여성주의 언론운동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역사적으로는 여성주의가 대학 안에서 이야기되기 시작하고 ‘영페미니스트’라는 용어가 흘러다니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과 연관지어 설명해야겠지만, 그런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겠다.(지식과 지면이 모두 짧아서.) 적어도 현재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비주류일 수밖에 없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정기적으로 자신들의 발언을 담아서 배포하는 여성주의 언론운동은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그나마 효과적인 활동 방식 중 하나이다. 하지만 여성주의 저널은 단순히 여성주의를 알리고 선전하는 선명하고 투명한 정치적 프로파간다일 수는 없다.
  단적인 예로, ‘다함께’에서 발행하는 <맞불>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어느 정도 단일한 이론적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에 선명한 주장을 담을 수 있는 <맞불>과 여성주의 언론들은 그 조건이 다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이미 이론적/운동적으로 단일한 무언가가 아니라, 다양한 페미니즘‘들’로 분열된 상태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주의와 여성 내부의 차이, 그리고 자기 성찰과 반복되는 해체, 재구성의 움직임 속에 내파(內破)되었다. 이제 페미니즘은, 단일하고 선명한 정치적 행동주의로서가 아니라 계속해서 고민하고 질문하고 많은 여성주의“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여성주의 언론 또한 선명한 프로파간다로서 만들어지기보다는 여러 고민들, 자기 모순과 성찰, 복잡성 속을 헤매는 텍스트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여성주의 언론운동은,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계몽’(?)하고 정답을 제시하는 방식보다는, 화두를 던지고 그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고민들을 풀어나가는 방식,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취하곤 하며 그러한 위치 설정에 더 큰 의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앤에 붙는 수식어가 “내가 묻는 방식”인 이유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라고 나는 멋대로 추측해본다.

  보통 ‘정답’은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단일한 ‘진실’은 불편할 수도 있지만 제시되고 주어진 진실은 여하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강제적이다. 하지만 ‘질문’은 불편하다. 특히 ‘정답’이 없는 ‘질문’, 함께 여러 가지 답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하는 것 같은 ‘질문’은 불편하다. 주어지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 ‘비판’ 또한 불편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불편하거나 힘들거나이다. 앤 하나를 발간하기 위해서 앤 편집진들은 얼마나 많은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거치는가? 앤이 풀어내는 여러 이야기들 속에서 실제로 새로운 삶을 재구성해내고 생산해내기 위한 고통은 또 얼마나 힘든가? 동시에 그런 고통, 그런 불편함은 일종의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마조히즘적인 기쁨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라-_-) 그동안 억압되어오고 언어화되지 못했던 것들이 새롭게 표현되고 생산되는 행복이며, 앤이라는 물질화된 결과물에서 느끼는 성취감이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앤의 독자들은 단일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얘기하며 끝맺고 싶다. 따라서 앤은 앤을 읽는 그 많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성격의 이야기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담아내야 한다. 예컨대 군사주의 기획 같은 경우에는, ‘모두’에게 ‘불편한’ 화두와 고민거리들을 던져주기 위해서는 군대 문화의 이야기, 일상적 군사주의에 대한 이야기, 병역거부 운동에 대한 이야기, 평화운동에 대한 이야기, 다양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 등등이 모두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산문, 운문, 삽화, 만화, 사진 등등 다양한 전달 방식을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모두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화제가 되는 앤이 되기 위해서는 말이다. 역량을 고려할 때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있다 보면 조금은 더 좋은 앤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앤이 같은 말을 반복하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묻는 다른 질문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물건이 되었으면 한다. 비록 “여성주의”라면 일단 삐딱하게 ‘낙인’을 찍고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더라도, 그 수가 많건 적건 앤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당히 불편한 책이 되었으면 한다. 너무 글만 넣지 말고 다른 표현 방식들도 실험하면서… ^^; 앤에 대한 나의 이 너무나 유한한 사랑을 담아, 참으로 유한하게 구성된 날림 글을 마친다.


* 미처 본문에는 끼워 넣을 곳을 찾지 못했는데, 나는 앤에서 뒤쪽에 예산 사용 내역과 후원 등을 밝히는 게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안의 여러 ‘저널’들을 봐왔지만 이런 귀찮은 작업을 하는 곳은 얼마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