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굴 속의 전화번호들

공현 2009. 4. 21. 23:15



굴 속의 전화번호들


1
  살다보니까, 가슴 한켠에 묻어뒀던 것들이 있을 곳을 잃어버리고 더 깊은 속으로 굴을 파고 숨어 버려서, 마음 속에 구멍이 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구멍은 뚫려 있지는 않아서 시린 바람이 드나들거나 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먹먹하고 허전하긴 하다. 예컨대 몇 년 전에 즐겨가던 식당을 갔는데 식당 대신 부동산 중개업소가 들어서 있을 때, 그와 마지막으로 커피를 마셨던 커피숍이 간판 자국만 남기고 경양식 식당으로 바뀌어 있을 때, 자전거를 타고 달렸던 이 거리가 낯선 간판들로 뒤덮여 있을 때, 유치원 시절 즐겨 봤던 만화책이 절판되어서 구할 수 없거나 제목조차 잘 생각이 안 나서 찾지도 못할 때….

  세상은 참 빨리 변하고 그 속에서 달라져가고 없어져가는 것들은 좀 지나치게 많다. 물론 나도 변하고 있지만… 그래도 간혹 내 기억 속의 것들을 찾아 딛은 발걸음들이 달라진 현실 앞에 고개를 저으며 가슴 속에 구멍만 남겨놓을 때면 좀 쓸쓸함일까 아련함일까 그런 비슷한 감정이 냄새처럼 내 몸에 배어들고 호흡이 느려진다.


2
  내가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또 있는데, 바로 전화번호들 때문이다. 내가 알던 전화번호가 사라졌을 때, 나는 그 전화번호와 관련된 기억이 아련한 추억이 된 것을 실감하곤 한다. 예를 들어, 아주 나이가 적을 때 나는 서울에서 외가와 같이 살았는데, 그 집 전화번호는 6355로 끝났다. 그러다가 전북으로 이사를 왔고, 외가도 장미원(아마도 수유4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래도 한동안 6355라는 번호는 할아버지의 휴대전화 번호에 남아 있었고, 할아버지의 휴대전화를 잠시 빌려 썼던 내게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외가도 대전으로 이사를 했고 부모도 우여곡절 끝에 대구로 또 이사를 했고 나는 서울에 자취를 하는 지금은, 이제 6355라는 번호는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번호가 되었다.

  그밖에도, 나는 내가 좋아하거나 나랑 어느 정도 이상 친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내 휴대전화에 저장하지 않는다. 휴대전화 메모리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도록 외워둔 것이다. 휴대전화가 보급되면서 사람들이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게 되었고 휴대전화를 잃어버리거나 휴대전화가 꺼지거나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는 불안한 인간이 되고만다, 뭐 이런 류의 이야기도 해볼 수 있겠다.

  뭐, 하지만 사실은 실용적 의미보다는 심리적으로 부여하는 의미가 더 크다. 일종의 차별인 셈인데, 난 사적인 관계에서 이런 식의 친소(親疎)에 따른 차별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 예외적인 경우도 있기는 있어서, 별로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저장해두지 않고 외운다거나 하는 경우도 한두 건 정도 있긴 있다. 여기에서 공개하자면, 저장하지 않고 외운 번호는, 집 전화 번호 같은 걸 제외하고 이야기하면, 어디 보자… 대략 10건 정도는 되는 것 같다.

  휴대전화를 열고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 때, 전화번호부 창을 뛰워서 검색을 누르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숫자의 조합들을 누르다 보면 특별한 애정이 생기는 것 같다. 문자메시지를 받거나 전화를 받을 때도 저장되어 있어서 곧장 이름이 뜨는 게 아니라 익숙한 수열을 보고서 누군지 인식해내는 그 짧은 순간이 즐겁다. 그게 그냥 자기만족일지, 일종의 구별짓기에서 오는 쾌감일지… 뭐 여하간에.

  그러나 이 10건의 번호 중에는 지금은 유효하지 않은 번호도 포함되어 있다. 과거에 사랑했던(그러니까, 연애감정을 가졌던) 사람들의 번호를 나는 모두 외웠었다. 고2 때 처음으로 짝사랑해봤었던 사람의 번호건, 고3 때 같이 활동하면서 짝사랑했던 사람의 번호건, 바로 재작년에 사랑했던 사람의 번호건,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번호건 모두 외우고 있다. 이 중 두 사람의 번호는 지금은 다른 번호로 바뀌어 있고, 내가 외웠던 번호는 죽은 번호가 되고 말았다.

  이미 수 년 전에 번호가 바뀌었다는 알림 문자메시지를 받았고, 새 번호를 메모리에 저장했었다. 그렇게 새 번호를 저장하면서 나는 내가 한때 사랑했던 그 감정과 기억이 과거의 것이고 현재에는 이미 다른 의미로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됐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 번호가 그 사람들의 아이덴티티 중에 하나였던 그 어느 짧은 시점에만 있었을 뿐, 나도 그 사람들도 모두 변한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외웠던 번호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가끔 헷갈릴 때도 있지만 잠깐만 굴 속을 뒤적여보면 금방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그 번호들을 가끔 되뇌일 때마다 나는 그때의 기억들을 다시 되새기게 되고, 내 호흡수를 떨어뜨리는 어떤 냄새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3
  쓰다 보니 마치 그런 느낌이 통증인 것처럼 읽을 분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깊은 구멍 속에 들어앉은 추억들은 아픔은 아니다. 그런 추억들이 나라는 인간의 퇴적층의 깊이를 만들어주고, 복잡한 감정과 생각들을 뒷받침해줄 테니까.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의 현재를 더 풍부하게 해줄 테니까. 그러다가 그 깊은 굴 속에서 좀 숙성되고 발효되면, 어느 술자리에선가 꺼내서 안주로 먹을 수도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좀 같이 나눠먹자고, 요리를 해서 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