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창틀에 걸린 꿈들

공현 2008. 1. 13. 22:48

창틀에 걸린 꿈들

( 2005년 6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에는 창이 없다."라는 말은 깊은 인상을 주는 말 중 하나이다. 뭐, 모나드(단자)론 같은 복잡한 이야기는 잠시 밀어두고 간단히 비약하자면 "개인은 단절되어 있다"는 소리다.


 헌데 모나드에는 정말 창이 없는 것인가? 각자의 꿈이라든가, 이야기라든가 하는 것들은 결국 세상으로 조금씩은 흘러나갈 수밖에 없다. 그건, 창이 아니라 벽을 통해 전달되는 희미한 소리나 울림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인가. 애초에 개인의 영혼 같은 것들이 모나드이기나 한 것인지 모호하다. 개인에게 창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은 역시 명확히 알 수 없는 영역에 속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인간들이 의사소통하는 데 사용되는 언어들(음성, 문자, 신체…)은 불완전하게나마 창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역시 그것도 단절될 것인가.


 기숙사에 살 적에, 아침에 눈을 뜨면 곧잘 창 밖으로 눈길을 주곤 했다. 이중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 나무들, 가게들, 집들, 전신주, 십자가들…. 간혹 아이들이 창문 밖으로 쓰레기를 던진다고 하는, 그런 곳. 나는 한 번도 쓰레기를 창 밖으로 던지지 않았다. 다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잠에서 덜 깬 내 꿈들을 날려보았을 따름이다. 마음에 창을 내고저. 그것이 우유봉지 같은 걸 날리는 것보다 더 심한 오염이라고 누군가가 지적한다면 하는 수 없이 나는 그것을 수긍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항상 제대로 나있지도 않는 내 마음의 창문을 통해 내 꿈들을 밖으로 날려보내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내가 창을 통해 날려보낸 꿈들이 죄다 창틀에 걸려버렸음은, 어째서일까. 결국 죄다 창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봐, 어설프게 접힌 종이비행기가 되어 날아간 내 편지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무엇에 걸려 제대로 날아가지 못한 거냐구."


 그것이 한계다. 내 창문의 한계다.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하건, 나는 이 방에 갇혀 있다. 내 방 창에서 보이는 다른 방의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려 해도, 몸짓을 해보려 해도, 그것을 전달해 줄 정도로 이 창은 명료하지도 투명하지도 않으며, 마음대로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편지를 우체통에 넣을 수조차 없어서 종이비행기로 불특정 다수를 향해 던져보지만, 그것은 계속 창틀에 걸려 떨어진다. 그건 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것도 마찬가지. 모두 만유인력이라던가, 뭐 그런 것들에 걸려서는,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사랑이라거나, 우정이라거나, 모두 마찬가지다. 법정스님 말처럼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에 지나지 않는지 어떤지 누가 안단 말인가. 우리는 서로의 편린만을 알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꿈들이 모두 창틀에서 걸려버리기 때문이니.



 그래도 우리는 꿈을 꾸고 있다. 그리고 꿈을 꾸고 있기에 우리는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 '방 곁에 사는 사람이 혹시, 만에 하나 고개를 들어 이쪽을 봐준다면, 적어도 창틀에 걸려 있는 숱한 꿈들은 볼 수 있을 터이다. 근처에 떨어진 꿈의 조각 하나를 주워 들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런 상상, 그것이 희망이라 불리는 것.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방에 갇혀 있지만, 계속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며, 창틀에 걸려 나가지 못하는 꿈들을 계속 창가에 매단다. 더이상 꿈을 날리는 시도를 하지 못하게 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경우뿐.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계속 꿈을 창밖으로 날린다. 설령 우리가 서로를 그 편린밖에 알지 못한다 해도, 그 편린이라도 알게 되어서 행복하다고 하는 연인들이 있고, 친구들이 있고, 가족들이 있다.

 모나드에 창이 있을지 없을지,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설령 불투명한 창일지 몰라도 창은 있을 것이라고 답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