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비를 맞고

공현 2008. 1. 13. 23:04

비를 맞고


 나는 비가 내려서 기분이 우울해진다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다. 나름대로 감상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지 구름이 좀 꼈다거나 하는 이유로 우울해지는 일은 없다. 구름이 좀 꼈기 때문에 더 우울해진다거나 더 즐거워지는 일은 있지만. 비가 내리기 때문에 더 우울해진다거나 더 즐거워지는 일은 있지만.

 비가 점심때부터 쏟아져 내렸다. 우산을 안 가지고 왔기 때문에 조금 난감했지만 곧 평소처럼 당당하게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내려온 빗방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 구름으로서의 삶을 지탱하지 못하고 투신한 빗방울들이여.

 요즘 유명해졌다고 하는 미하엘 엔데가 쓴 『모모』를 보면 비가 워낙 촘촘하게 내려서 산소 호흡기를 써야 할 지경이었다는 장면이 등장한다. 정말 그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나는 피부를 때리는 빗방울들의 가락을 느낀다.
  전율. 이 정도로 세찬 비를 맞아본 것도 실로 오래간만이다. 몸을 훑고 가는 전율을 느껴본 것도 오래간만이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 가슴 한 구석에 쌓아뒀던 슬픔들이 치밀어 오르는 기분. 차가운 타자. 살아 있다는 감촉. 나는 나 자신도 빗방울처럼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왈칵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김광석, 「사랑했지만」) 사랑을 하면 정말 청승맞은 유행가의 노랫말이 가슴에 절절히 와 닿는다고 한다. 내게는 빗방울 자체가 절절히 와 닿는다. 그것은 내가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빗방울의 감각에 예민하게 곤두서는 신경은 과거를 건드리고 현재를 건드린다. 쏟아져 나오는 추억, 그리고 현실. 꿈. 이루어지지 않는 미래. 혹은 이룰 수 없는 미래. 사랑, 미움, 아픔…….


 나는 사실 비를 썩 좋아하는 편이다. 몸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되도록 비를 맞고 다니지 말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지만, 틈만 나면 그것을 어기곤 한다. 기분이 우울한 날 비가 내리면 우울한 기분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서 좋아하고, 기분이 좋은 날 비가 내리면 좋은 기분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서 좋아한다. 그리고 그 비를 맞으면 더욱 그렇게 된다. 여하간 비라는 녀석은 청각, 시각, 후각, 촉각을 고르게 자극해줘서 내 정신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우리들은 빗소리 너머에서 누구의 목소리를 듣는 걸까. 구름 끼고 비내리는 흐릿해진 세상의 풍경들 너머에서 누구의 모습을 보는 걸까. 그것은 각자의 추억과 상상력에 달린 일일 터이다.
 피부에 닿는 빗방울의 감촉이 어째서인지 내게 깨닫게 해주는 것들이 있다. 나 자신의 감촉은, 정말 다른 것으로부터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이가 없다면 나도 없다는 것이다. 다른 존재를 느낄 때 나는 나 자신도 느낄 수 있다. 흠뻑 젖는다는 느낌은 항시 자조적이고 처량하면서도, 즐겁다. 옷에서 나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비 냄새도 가끔 반갑다.


 흠뻑 젖은 나를 보고 어떤 사람이 우산을 빌려주겠다고 한다. 나는 별다른 군말 없이 승낙한다. 어쨌건 간에, 그런 거다. 비 맞기라. 조금, 무리를 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시원하게 비를 맞아보는 일도 근래에는 얼마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