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읽고도 알지 못하는 걸까

공현 2008. 1. 13. 23:14

이건 '수필'이라는 생각조차 거의 하지 않고 휙휙 써내려간 문자 그대로의 수필(?)


( 2005년 9월)



읽고도 알지 못하는 걸까



 『모모』를 읽어보았는가. 그래, 그 얼마 전에 모 드라마에 나왔다고 하여 유명해진 그 책 말이다.  (그 책이 드라마에 나오기 전에 대단히 인상 깊게 읽었던 사람으로서는 좀 씁쓸하다.) 세상에 나온 지 몇십 년 된 미하엘 엔데씨의 동화인지 소설인지 애매한 책 말이다. 그 책에서 첫째로 인상 깊었던 것이 귀기울 줄 아는 모모와 한 번 쓸고 한 번 숨쉬는 청소부 베포, 이야기꾼 기기의 삶이었고, 두번째로 인상깊었던 것이 회색신사들이었다. 회색신사라는 존재는 미하엘 엔데씨가 사람들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모』를 읽어도 알지 못하는 듯하다.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회색신사들이 기생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기자신이 회색신사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지.

 벼슬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수식어, 절대로 거부하고 싶은 허구적인 수식어를 달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인 내 삶을 들여다보자. 예를 들어 고3 담임 선생님들은 요즘 들어 수능이 83일 남았다고 아침 자습 시간에 20분 일찍 와서 공부하고 점심시간에 40분 일찍 와서 공부하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다. 시간을 아끼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다. 지금 열심히 해서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쉬라고 하고 있다. 이런 태도가 사람들에게 찾아와서 하루에 몇 초를 낭비하고 있는지 아시느냐고, 계산기를 두드려 현란한 숫자로 사람들의 기가 질리게 만든 다음 시간을 아끼라고 하고선 그들의 시간을 훔쳐먹고 사는 회색신사들의 행태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지금 열심히 일해서 저축한 시간을 가지고 나중에 여유롭게 살라는 논리,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는 논리, 무조건 시간 아껴서 열심히 일하고 보라는 논리.

 『모모』가 9주 연속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모모』를 읽었다지만 과연 그 중에 자기 삶을 변화시킨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심스럽다.『모모』를 읽어도,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어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봐도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항상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 같은 소리를 들어도,(사실 상당히 온전히 실현하기는 어려운 일이긴 한데) 멋진 말이라고만 생각하고 마는 모양이다. 말이야 좋지만 실제로는 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회색신사는 허구나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책을 읽어도, 무슨 말을 들어도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진짜 회색신사는 자기 안에 있는 거라는 사실을. 회색신사와 계약을 맺고, 자기 안에 죽은 시간들을 들여놓은 데는 자신도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 카르페 디엠! 아무리 우리가 급하게 살아야 하는 세상이라고 해도, 그게 불가항력이라고 해도,(나는 불가항력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설혹 타협을 짓더라도 사는 데 꼭 필요한 만큼만 타협을 지으면 되는 일이다. 적어도 자기 자신까지 버리면서 그렇게 될 필요는 아직 없다.


 스스로 말하길 『모모』를 재미있게, 혹은 감명 깊게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여, 제발 그게 사실이라면 『모모』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속삭여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삶을 반성해보라. 문명비판서는 넘칠 정도로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루한 책도 있지만 재미있는 책도 있고, 어이없을 정도로 책이 있는가 하면 논리적이거나 감명깊은 책도 있다. 진실성이 느껴지는 책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문명비판서들이 나오는데도, 왜 이 사회는 그리 바뀐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걸까. 그나마, 기껏해야 웰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음식건강법으로 나온 것이나 효과를 좀 발휘하는 걸까. 사람들은 읽어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 걸까.

 사람들은 내가 특이하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나는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의 일부나 내가 읽은 책 몇 권들, 인권선언이나 대한민국 헌법 같은 것들을 곧이 곧대로 믿고 있는 순진한 자일 뿐이다.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당위적으로 그래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순진한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계에 조화시킨다. 비합리적인 사람은 세계를 자신에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모든 진보는 비합리적인 사람 손에 달려있다."(조지 버나드 쇼) 도덕교과서를 무시하지 말라. 그 안에 있는 말이 모두 맞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유익하다.『모모』가 동화책 같다고 무시하지 말라. 괜히 "내가 정말 배워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고 하겠는가. 나는 저 말이 '우리가 배워야 할 당위적인 것'들만 두고 본다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해서 나는 오늘도 자습시간에 학교 주위를 배회하며 학생들을 재촉하고 다음에 여유있을 때 산책하라는 교감선생님에게 당당히 외친다. "틀어박혀 공부하는 시간보다 내가 이렇게 호흡하는 시간이 더 유익합니다. 인생에 다음따윈 없습니다. 지금이 있을 뿐." 교감선생님은 그냥 웃고 가버리신다. 글쎄. 내게 미래는 현재의 일종일 뿐이다. 나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현재를 위해 노력하는 지금이 보람차지 않다면, 다른 현재를 포기해버릴 것이다. 즐겁지 않은 인생, 지금 당장 의미가 있는 게 아닌 인생, 그런 건 무의미하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다보면, 현재의 마음을 보류하다보면, 그 보류된 마음이 쌓여서 미래에는 풀 수 없는 마음의 앙금이 되어버린다. 현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미래. 공허하지 않은가? 직접적인 괴로움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보람과 의미에 대해 말하는 거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지금의 욕심이나 그런 게 별 거 아니고 논 게 후회만 된다고 지금 열심히 공부하라는 담임선생님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따지면 죽고 나서 보면 삶이란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를 들이대서 강요할 거라면, 모범을 보이셔서 그냥 지금 죽으시지요."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니까 미움 받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