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에누리

공현 2008. 1. 13. 23:18

에누리

(2005년 8월)


  요즘 세상은 참 이상하다. 규모가 크고 현대적인 가게에서는 손님들이 에누리를 잘 하지 않는다. 각종 할인 상품이 쏟아져 나오긴 하지만 거기에서 할인이란 손님과 가게 주인 사이의 흥정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가게 쪽의 일방적인 판매전략이다. 반면 시장이나 길거리에 앉아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거래를 할 때는 곧잘 값을 깎는다. 부유한 자들의 물건을 살 때는 값을 깎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물건을 살 때 값을 깎는 셈이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中)


  사람들은 때론 참 잔인하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다. 커다란 매장에서는 판매자 쪽에서 브랜드네임 같은 것들을 빌미로 에누리 붙이는 것을 손님이 보고만 있는다. 반면 시장 바닥에서는 손님이 에누리한다.(에누리에는 이윤을 남기려고 붙인 것, 즉 마진의 의미도 있고, 가격을 깎는 것의 의미도 있다. 서로 상반되는 두 의미를 지닌 단어다.) 곧 내 돈의 가치를 에누리하고 다른 사람이 파는 상품의 가치를 에누리하는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음으로써 자기 것을 불리는 방식이다. 날강도근성이다.


  나도 얼마 전까진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물건 값을 깎지 못하는 내가 어리석다는 생각을 간혹 했다. 그러나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니 또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물건 값 깎는 일을 하지 않는다. 나도 대량으로 복사나 인쇄를 하는 경우에는 깎기도 하고 노래방에서는 흥정도 한다. 단골로 다니는 문구점이나 서점 같은 데는 내가 흥정하려 하지 않아도 깎아줄 때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길거리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에누리하지 않는다. 대신 언젠가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에누리를 하려 들어보겠노라 다짐해보는 건 좀 곤란한 일일까. 기차 삯을 에누리하려던 시골영감님처럼.


  혹자는 에누리야말로 시장바닥에 남아 있는 정(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성이 두드러게 나타나는(예를 들어 시장과 구멍가게와 대형마트가 한 마을에 있는) 현대 사회에서 그런 식으로 남들 사정은 아랑곳않고 자기에게 유리한 점들만 이용해먹으려고 하는 것은 좀 비양심적이지 않은가? 길에 앉아서 직접 캐온 나물을 팔고 있는 할머니께 돈을 더 드리는 것은 사려깊지 못한 동정이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의 마음씀씀이를 이용해서 값을 더 깎으려 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짓이다. 대개는 값을 깎거나 하지 않아도 푸짐하게 담아주는 인정이 있는 곳인데 말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 떠돌던 "재산 없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란 텍스트를 보면 "서 푼짜리 인정에 약"한 것과 "도덕성이나 인간 관계를 이득보다 우선하는 줄 착각"하는 것을 욕하고 있다. 이젠 아예 그런 식의 노골적으로 돈 벌려면 도덕이나 정 같은 건 버리라는 류의 글들이 떠돈다. 그래도 그 텍스트에 달린 댓글들 중에 그 부분을 욕하는 내용이 많다는 건, 아직 배금주의가 사회를 모두 잠식하지는 않았다는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잠시 막연하게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