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2008.01.08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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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아즈망가 ost cd 중 오사카 테마 곡 표지의 그림...?)




 

낮은 눈높이

 (2004.09.)


  현대. 자연과학에서는 미시(微示)적인 분야들이 한창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일상과 상식으로 무장된 우리들에겐, 유전자가 어떠니 원자가 어떠니 하는 이야기들이 실감으로 다가오질 않는다. 세포만 해도 실감이 안 날 정도로 작건만, 또 그 안에 들어있는 유전자라니. 차라리 완두콩이 쭈글쭈글하니 하면서 직접 보는 것, 겉으로 드러나는 형질을 관찰하는 쪽이 유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사과가 산소와 반응해서 맛이 달라지느니 어쩌니 하는 것보다는 그냥 갈색으로 변해서 맛이 달라졌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아무리 현미경의 성능이 좋아져서 분자, 원자 단위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해도, 사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혀 알 수 없는, 다른 세계 이야기 같다. 아무리 유전자 연구가 어떤 성과를 올렸다는 소식이 들려도,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유전자 연구로 인해 나온 결과, 즉 무슨 병을 치료하게 되었다, 노화를 방지하게 되었다, 와 같은 이야기이지, 유전자라는 그 조그마한 것을 다루는 그 자체는 아무리 유전자라는 개념이 친숙해져도 일상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이해할만한 것과는 조금 동떨어진 것으로 느껴진다. 일상과 상식의 울타리 안이 우리들이 실감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눈의 위치―시점(視點)을 움직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세계의 변화이다. 특히 횡적인 이동이 아니라 종적인 이동의 경우에는 더욱 그런 것을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다. 종적인 이동이란 것은 단지 높이의 변화 뿐 아니라 대상에 대한 밀착도의 변화이기도 한데, 횡적인 이동이 비교적 비슷하고 대등한 관점 사이에서 변화를 주는 것이라면, 종적인 이동은 시야 자체에 변화를 주기 때문에 실감에 직결된다.


  몇십층 빌딩 위에서, 혹은 비행기를 타고 높은 시점에서 부감(俯瞰)한 광경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시점을 낮춰서 미시한 모습도 또 다른 느낌으로 비현실적인 모습을 던져주기 마련이다. 현미경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들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 땅바닥에 엎드려 보기만 해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속 낮은 자세로 사람들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평소의 일어선 시점에서 본 것과는 다른, 묘한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구체적인 두려움, 어떤 사람은 단순하고도 막연한 이질감.


  그러나 그런 실감의 부재, 비현실감이 또한 매력으로 작용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게으른 성격의 내가 유독 청소에 집착하는 것은, 강박적인 성격도 원인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청소가 즐겁기 때문이다. 청소를 할 때에도 낮은 시점을 느낄 수 있는 탓이다. 청소는 눈높이에 있어 일종의 일탈(逸脫)로서 매력적인 활동이다. 특히, 그 청소의 대상이 우리가 가장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공간인 우리 자신의 방, 혹은 학교, 직장 등이라는 점이, 더욱 그런 면을 강하게 해준다.

  청소란 것은, 어느 정도 더러워지고 어지러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느긋하게, 하나하나 살펴가면서 하는 것이 좋다. 빨리 빨리 해치워버리는 건 그리 좋은 청소가 아니다. 빗자루에 걸리는 것들을 뭐든 신경 안 쓰고 쓰레기통에 몰아 넣어버리고, 걸레질도 휙휙 해버린다면, 청소의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청소를 하다보면 여러 가지 눈에 안 띄던 것들을 볼 수 있다. 바로 발 밑, 내가 그냥 건너다보던 창문, 책상 위, 여러 곳에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숨어있다. 걸레질을 하면서 창문을 보면 눈치채지 못했던 흠집이라거나 얼룩이 보이고, 걸레가 지나간 자국이라거나 손자국이 눈에 크게 들어온다. 허리를 굽히고 바닥을 쓸 때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눈에 띄고, 분필자국이라거나 발자국, 같은 것들도 보이곤 한다. 튀어나오고 긁힌 자국들이 보이면, 그런 자국들이 생긴 사건들을 떠올려본다. 거무스레한 얼룩을 보고 아, 언제 먹물을 엎질렀었지. 난리도 아니었어, 참. 굴러다니는 빵 포장지라도 발견하면 아 저건 언제 먹었던 거였지, 한다거나 누가 먹었었어, 하면서 회상을 해보고, 또 영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상상력까지 동원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본다. 그런데 저게 지금까지 남아있었나? 조금은 알쏭달쏭하다. 평소 별 생각 없이 밟고 다니던 바닥이 이렇게 생겼었나, 또 깨끗해 보이던 유리창이 이랬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손에는 걸레나 빗자루를 들고 바닥에 무릎을 꿇어보면, 이미 거긴 다른 세계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현실이 아니다.

  침대 밑을 뒤적거리면서 굴러가는 먼지 덩어리를 보면서 멍하니 있는 것도 즐거운 일 중 하나다. 잘 살펴보면, 먼지 덩어리들의 크기, 모양, 색깔도 제각각이고, 그 굴러가는 모습도 특색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먼지 덩어리에는 긴 머리카락이 엉겨있고, 어느 먼지 덩어리에는 빵 부스러기가 묻어있다. 조금만 상상력을 곁들여보면 먼지 덩어리에게도 개성이 있고 나름대로 꽤나 파란만장한 과거가 있다.


  그렇게, 조금만 눈높이를 낮춰보면, 여러 모습들을 찾을 수 있다.


  고개를 숙이고 걷는 버릇이 든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매일같이 걸어다니는 길바닥이 매일같이 얼마나 많이 변하는지, 그리고 또 변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우리의 눈에 던져주는지. 계절에 이르게 진 낙엽이라든지, 누군가가 떨어뜨리고 간 머리핀, 버리고 간 깡통, 달라붙은 껌자국. 져버린 꽃. 신발을 털어서 생긴 흙덩이들. 항상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던 불변의 일상, 그 안정적이던 세계가 계속 변화하는 무언가였다는 사실.

  아침. 길을 걸으며 바닥을 잘 보면 지렁이들이 보인다. 때로는 무언가에 밟혔는지 ―아마 사람일 것이다. 납작하게 죽어있는 모습도 보인다. 때로는 꿈틀거리면서 어딘가로 열심히 가는 모습이다. 때로는 개미들에게 공격을 받으면서 바둥대는 모습이다.

  한낮. 개미떼들이 걸어가는 사람의 발 밑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어떻게든 밟혀 죽는 걸 피해보려는 듯, 사람의 발이 바로 근처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갑자기 뽈뽈대는 게 빨라지는 까만 덩어리들. 좀더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면 표정까지 보일까?

  여름. 창틀 청소를 하면서 많은 벌레들의 시체를 보게 된다. 하루하루, 하루살이들의 시체들이 새롭게 창틀에 쌓인다. 그렇게 쌓인 수많은 하루들을 대수롭지 않게 빗자루로 슥 쓸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혹은 그러는 중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중 몇 마리는 꿈틀거리는 것을 알 수 있다. 빗자루를 대보면 날갯짓을 해보는 녀석도 있다. 그러나 쓸지 않고 한동안 그대로 두어봐도 끝내 날아오르지는 못하곤 한다. 어제.

  겨울. 겨울의 길바닥하면 빙판이라거나 얼어붙은 휴지뭉치 같은 것도 기억에 남지만, 역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눈이다. 얇게 깔린 눈 위에 남은 발자국들의 제각각인 모양들. 신발의 모양도 모양이지만, 그 발자국에 남은, 밀린 모양이라든가 걷는 모양새, 흙. 누군가가 눈을 뭉쳤는지 쓸린 눈. 후―하고 분 듯 날린 눈. 눈 위에 쓴 낙서.


  인간의 세계 바로 곁에, 인간이 자기도 잊어버려가며 남긴 흔적들이 생생하게 남아서는 그것을 남긴 인간과는 별도로 존재하고 있으며, 또 미처 인간이 신경 쓰지 못한, 인간과는 거의 무관하기까지 한 여러 삶들이 펼쳐지고 있다. 매번 다른 모습, 다른 세월들이. 그것이 우리가 눈을 낮췄을 때 펼쳐지는 이세계요, 현실 아닌 또 다른 현실이다.


  인간적이란 말은 애매한 개념이지만, 기계적인 것, 무정(無情)한 것에 대비되어 쓰일 때를 생각해보면,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지 않기 위해 도망 다니는 개미와, 몸부림치는 지렁이의 모습도 또한 인간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 이전에 생명인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느끼는 인간성은 사실상 생명으로서의 동질성일 것이다.


  높은 눈높이가 우리에게 신(神)적인, 초월적인 느낌을 준다면, 낮은 눈높이는 그런 미물(微物)적인, 지극히 지상(地上)적인, 또한 사소한 것에 대한 느낌을 준다. 낮은 눈높이에 익숙해진 인간은 보다 작고 근본적인, 또 개별적이면서 비재현성을 띤 모습들을 알 수 있다. 인간이나 벌레나 생명으로서는 크게 다르지 않고, 먼지덩어리도 존재라는 면에서는 인간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그러면서도 각자에게는 개성이 있다는, 그런 동정―공감을 느낄 수도 있다. 비현실적인 세계가 현실로, 기이한 실감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일상. 자신의 눈높이만으로 살면서 보는 좁은 세상에 비하면, 세상은 너무 넓다. 작아 보이는 책상도 그 주름 잡힌 부분을 모두 펴면 엄청나게 넓어진다고 한다. 그 주름 하나하나에 새겨진 세월들이 또 있다. 나무테처럼.

  현실이 조여온다고, 현실에 치이며 일상과 상식의 잣대만을 들이대다보면, 어느새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하기에 바쁘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데도 해야 하는 일은 뭔가 재미가 없다. 의무란 것만 무작정 짊어지다 보면 지치기도, 지겨워지기도 쉽다. 그럴 때면, 눈을 돌려보는 것도 좋다. 미물이라거나 작은 것들이라고 하면서 무시하기에는, 우리의 바로 곁에서 일어나는 삶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면, 낮은 눈높이를 가져보는 것이 결코 바보 같은 것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삶은 경험으로 풍부해지는 법이니까는.

  풀잎 위에 맺혀있는 이슬을 보면, 하늘이 있고 그림자가 있다. 이외수 씨의 소설 『칼』에서는, 이슬 속에 온 세상이 비치고 있다고 말했다. 나처럼 눈이 나쁜 사람 같은 경우는, 온 세상까진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먼 산 그림자와 자신의 얼굴 정도는 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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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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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01.08 01:16
체온

(2004.08.)

 

 서기 2004년은 더운 여름이었다. 여름. 많은 사람들이 덥다고 난리를 쳐대고 있다. 40년만의 무더위. 낮이면 나는 어느 도시는 섭씨 33도, 어느 도시는 섭씨 35도까지 올라간다고 하는 아침의 일기예보를 상기하며 섭씨 36.9도 근처는 될 법한 공기 속에 가만히 앉아있고는 했다.
 
 체온이 남아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뜻한다. 죽음은 많은 경우에 싸늘한 이미지로 다가오고, 차갑게 식은 몸은 섬뜩한 죽음이 깃든 몸, 시체를 의미한다. 냉기는 죽음이고 열기는 생명이다. 빛, 열, 생명. 이러한 집합의 반대편에는 어둠, 냉기, 죽음 등의 집합이 있다. 이것들을 묶는 것은 유(有)와 무(無)의 분류법이다. 빛의 부재는 어둠이고 열의 부재가 냉기이며 생명의 부재가 죽음이다. 그리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모나드(Monad)에 창이 없는 것이 고독이라면 그런 고독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 외로운 사람은 유(有)를 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인훈씨의 소설, 광장에서 지나가듯이 나오는 고독하니까, 라는 답변들이 터무니없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외로움을 느끼는 인간이란 무엇을 해서라도 부재의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한여름의 무더위가 시작될 때까지 긴소매의 점퍼를 입고 다녔다. 고행이니, 감기니, 여러 가지 이유를 남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꾸며 보았지만, 어쨌건 나는 일종의 노출기피증인 셈이다. 혹은, 잠들기 전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그 나른한 느낌, 내가 좋아하는 그 느낌을, 점퍼를 입고 있으면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한 걸지도 모르겠다. 사춘기의 병적이고도 발작적인 불안과 외로움과 상처 앞에서 더욱 내 개인적이고 사적인 밀실 속으로 숨어들고자 했던 것일지도. 확실한 것은, 긴소매의 옷을 입고서 느껴지는 나 자신의 체온에 나는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주된 이유이건, 부수적인 이유이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는 것만은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다. 어쩌면, 위에서 열거한 것들과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맥락의 이야기일 것이다.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의 체온, 그런 곳에서 난 위안을 찾고 있던 것이다. 그런 식의 감정이 자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는 것 또한 자각하고 있었고, 그런 자각은 간혹 더한 우울과 자괴로 나를 몰아넣곤 했지만, 그래도 긴소매를 포기하기엔…… 추웠다. 사실, 덥지 않느냔 질문을 받을 때에도 내가 하고 싶은 대답은 춥다, 란 것뿐이었다. 종래에는 나약해진 정신이 낳은 환각인지, 늦봄, 내지는 초여름의 날씨에도 가끔씩 몸이 정말로 춥다고 느끼고, 또 불안감에 휩싸여서는 나도 뚜렷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갈구하며, 또 휘청거리며 눈을 감곤 했다.
 
 체온에 육박하는 기온 속에 앉아있을 때면 그런 점퍼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목욕탕에서 섭씨 36도 정도의 온탕에 몸을 넣은 다음, 눈을 감고 몸에서 힘을 빼면 육체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찬가지로, 기온이 36도에 달하는 더운 날이면 자연스러운 상태의 공기 속에 잠겨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체온에 둘러싸여 있는 듯한 착각에 얼마든지 빠져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땀이 조금쯤 흐른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심리적 안정감만 얻을 수 있다면, 햇볕이 아무리 따가워도 괜찮은 것이다. 그늘에 앉아있는 것도 나쁘진 않은 일이다. 그런 면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름의 무더위만 오면 그토록 찾는 현대 문명의 축복, 각종 냉방기기들이야말로 나에게는 적이었다. 냉방병에도 곧잘 걸리는 나의 튼튼하다고는 못할 몸도 몸이지만, 냉방기기가 만들어낸 인공적인 추위에 갇혀 있다보면 마치 안도현씨가 읊고 박경찬씨가 노래부른 추운 도시를 실감하고 있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혀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확실히, 봄이 왔으나 세상은 아직 춥다는 외침은 공허한 것만은 아니고, 또 그런 인공의 추위를 느끼는 사람들을 단지 도시에 적응 못한 낙오자라고 치부하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추위는 진정한 자유주의, 개인주의는 어느 결에 상당부분 소실되어 버린 것을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누군가 이 글에 공감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일 것이다, 라고 막연히 상상해보고 있다.
 
 그런 추위를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 틈에 낄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래알 군중, 고독한 군중이라는 이야기가 괜한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는 소실된 개인을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느낄 수 있다. 군중 속에서는 추위를 벗어나기는커녕 군중이 내뿜는 열기에 자신의 체온까지 빼앗기는 기분이 들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2002년 월드컵이다 뭐다 해서 한창 시끄러울 때에도 멍하니 집 소파에 누워서 미친 듯이 소리지르는 군중들을 묘한 쓸쓸함을 느끼며 TV로 보고 있을 뿐이었고, 학교 여행을 가서 장기자랑이나 캠프파이어를 할 때에도 어울려야만 하는,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과 휩쓸리기 싫은 마음 사이의 괴리 때문에 어색하기만 했다. 중앙에서 타오르는 캠프파이어의 열기에 취한 사람의 무리들. ― 사람들이 아니다. 무리일 뿐이다. ― 느껴지는 열기는 사람의 체온이 아니라 군중의 광기가 만들어내는 열기일 뿐이었다. 열띤 헐떡임, 미친 듯한 외침, 광신도, 웃음, 울음. 사실 그런 실망 아닌 실망을 겪기 전부터 그런 현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을 테지만. 그런 집단의 광기 안에는 어설픈 개인주의자가 설 땅은 없는 것이요, 그런 사람은 애초에 그 속에 서있을 수가 없는 종자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미칠 수는 있어도 집단적인 광기에 취하는 것은 끝내 거부하는, 골칫덩이 고집쟁이인 셈이다.
 
 숱한 소설은, 시는 그런 골칫덩이, 외로운 사춘기 소년을 말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아이의 모습을, 사춘기의 모습을 안고 있다.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요원한 일이고, 또 그런 것이 필요한 일일지도 생각해볼 문제다. 하지만, 분명 그래야 할 터인데 마치 그런 사춘기는 이미 멸종한지 오래라는 듯이, 내 주위는 온통 여자아이들 중 누가 예쁘니, 어느 사이트가 어쩌니, 어느 게임이 재미있니, 어느 축구 선수가 잘하니, 하는 소리 밖에 할 줄 모르는 아이들로 메워져 있었다. 소녀들 쪽은 잘 모르겠다. 함께 지내본 적이 거의 없었고, 같은 학교 안에서도 아는 아이를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내 인간관계가 좁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쪽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을까. 여하간, 내가 접촉하는 소년들의 경우 진지한 태도로 하는 이야기는 대개는 정치나 대학에 관련된 이야기가 대부분으로, 그렇게 주위는 온통 현실주의자들로 숨막히게 들어차 있었다. 사춘기 소년이란 것은 이미 기록에나 남아있고 이젠 거의 멸종해버렸는지도. 또는 저 깊은 곳으로 숨어서, 아이들의 외부엔 드러나지 않고 있는지도. 하긴, 사춘기 소년은 수줍음이 많다니까 아이들의 저 마음 속 깊은 곳에 틀어박혀서, 조용히 자신이 괴사 당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서 그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는지도, 사실은 아이들은 혼자 있게 되면 떨어지는 꽃잎에 감상적이 되고 외로움에 떨고 있는지도, 그럴 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쓸쓸한, 그리고 또 씁쓸한 이야기이다. 나처럼 대놓고 휘청거리는 것보다 더 힘들 테니까 말이다. 조금만 더우면 에어컨디셔널을 불만스런 목소리로 외쳐대는 현대의 아이들이지만, 그래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주위에서 요구하는 수많은 현실들 속에서 그렇게 강하게 자라났는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거짓에 지쳤다면서 온갖 강함을 던져버리고 나약만을 끌어안은 사람과는 달리. 짝사랑을 하면서도 부모님과 학업 때문에 사귀려는 생각도 할 수 없다는 어느 아이의 말에서, 그리고 시험 공부를 하다가 별안간 울면서 나무에 주먹을 쥐어박는 어느 아이의 모습에서 그런 흔적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설령 현대의 청소년이란 것이 과거의 사춘기 소년에서 현대 사회에 맞춰 진화한 결과라고 해도, 그들의 모습에 그들 조상의 모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어렴풋한 모습 밖에 찾을 수 없는 진화라는 것 또한, 쓸쓸하고도 씁쓸한 일이지만…….
 
 자연이 체온의 착각을 주는 철이 지나가면 난 또 점퍼와 제 체온에 기대어 버텨나가고, 인간에 대한 갈망을 견뎌 나갈 것이다. 어리석은 위안일지언정.
 
 우리는 고독이 적이 아님을 안다. 고독은 양날의 칼이라, 우리 스스로 그것을 감당할 힘이 없을 만큼 지쳤을 때는 우리를 짓누르지만, 또한 우리가 고독을 짊어지고 있기에 우리는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독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사랑하는 것이 사랑 받는 것보다 낫다고 말테의 수기에서 말하였다. 그렇다, 영영 사랑 받지 못하더라도 사랑할 수만 있다면 아직은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다. 고독한 짝사랑이건 뭐건. 그러나 살아가면서 우리가 품어왔던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 희망은 계속해서 끈 끊어진 연처럼 추락해버리고, 그런 실망은 끝내는 절망으로 이어져버리기도 한다. 희망의 부재, 절망에 가까워진 지친 상태에서 고독은 외로움이라는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 되어버리고, 그럴 때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고전적인 명구를 다른 의미에서 되새겨본다. 그것이 체온을, 인간을, 동종을 갈구하는 의미이다. 그런 상태에서 별 부담 없이 기댈 수 있는 대상 ― 친구라는 형태이건 가족이라는 형태이건, 그런 사람이 곁에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는 기뻐해도 좋은 일이다……. 우리가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처럼 온전하게 접근하지 못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건 어떻건 간에,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열원이 있다는 것, 그것은, ― 설령 그것이 가벼운 위안으로 보일지라도, 인간이여, 그대는 위안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 그래, 여하간에 좋은 일인 것이다. 그러니 인간을 갈망하고 체온을 갈망하고 부재를 두려워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비웃지 말지어다, 인간이여. 지친 사람의 나약함을 비웃지도 말을 일이다. 그런 사람은, 많은 짝사랑을 했고 또 많은 희망을 품어왔기에, 그만큼 많은 것에 지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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