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2008.01.08 01:34
이건 예전에 교내 백일장에서 썼던...
역시 2004년인가?




함성 바깥에서



 함성의 전제는 ‘함께’이다. 사전을 뒤적거려 보아도 ‘여럿이서’ 같은 말이 그 풀이에 꼭 붙어있다. 喊聲이라는 한자만으로는 그런 의미를 찾기 힘든데도 말이다.


 서기 2002년을 떠올려 본다. “아, 참 뜨거웠다”라든가 “굉장했지” 같은 소리나 늘어놓을 생각은 없을뿐더러, 그런 말은 과분하기도 하다. 그저 “참 시끄러웠지” 한 마디로도 족하다. 이 사람 저 사람 몰려다니며 함성을 질러댔던 해였다. ‘축구’가 무엇이기에, 라는 생각보다는 ‘우리’가 무엇이기에, 라고 먼저 물어본다. 텔레비전을 틀 때마다 방 안을 울리던 “필승 코리아”, “대한민국”의 함성, 그 경기장을 뒤덮은 응원소리가 소위 홈그라운드에 선 ‘우리’의 모습이었다. 약간 비약하자면, 그것은 또한 ‘자국 우선주의’라는 세계적인 추세가 질러댄 함성이기도 했다.
 

 고백하건대, 나는 월드컵 때에도 한국이 이기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적이 없었으며, 온 나라의 열기에 오직 냉소로 답했을 뿐이었다. 내가 애초에 축구를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무리가 만들어 내는 열기를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체온, 땀냄새, 그리고 함성이 만들어내는 시작도, 끝도 없는 듯한 공기의 미친 경련.... 그 모든 것이 나는 두려울 뿐이다. 그런 것에서 이미 숱한 실망을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춥다고 해서 불로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불에 날개를 데어 더욱 차가운 땅바닥에 떨어질지니. 공명할 수 없는 소리는 독이요, 해(害)일 뿐이다. 열광하는 무리의 속에서 인간을 찾지 못했을 때, 그 쓸쓸함은 더욱 비참한 색조를 띠는 것이다.


 그런, 경험에서 나온 ‘비관’이, 내가 서기 2002년 그 온통 시끄럽던 해에도 쇼파에 멍하니 누워 옆집에서 간간이 새나온 함성만 듣고 있게 한, 급우들의 열심히 이겼네, 졌네, 하는 소리에 형식적인 장단만 맞추게 한, 심적인 이유였으며 주된 이유이기도 했다. 곧, 나는 함성을 지를 용기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 뿐이다.


 나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함성을 지를 용기를 뱃속에 지니고 있다. 그에 대해서라면 충분하고도 남을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가깝게는 서기 2002년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그들이 함성 밖에는 지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산에 올라가서 사람들은 종종 고함을 지르곤 한다. 대개는 “야호-”와 같은 감탄사들이다. 한 번은, 산에 올라서 이렇게 소리쳐 본 일이 있다.
 “나는 자유인이다-!”
  솔직히 말해, 막상 하고 보니 꽤나 부끄러워서 도망치듯 정상에서 내려왔었다. 그래도, 비록 텔레비전 광고에서 따온 진부한 새로움일망정 , 그게 어디인가, 하는 생각에 조금은 뿌듯했던 것도 사실이다. 자주 오르는 산도 아닌데, 매양 야호만 질러대기도 무언가 허망한 노릇 아닌가. 세상을 저 아래에 놓은 만큼, 하고 싶은 말 하나 정도는 던져보는 것도 좋지 않은가. 이런 게 진정한, “함성 아닌” 고함이지 않을까?
 

 예전에 ‘가슴을 열어라!’ 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바 있다. 학교 옥상에 올라가서는 평소에 하고 싶던 말을 목이 쉬어라 외치는 게 그 내용이었다. 비록 그 외침의 목소리들 상당수는 그저 웃음거리 이상이 되지 못할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그런 곳에 ‘홀로’ 서서, 텔레비전 카메라와 전교생 앞에서 고함을 지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나는 그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자기 몸으로 서서 제 목소리를 제 입으로 낼 수 있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래, 어쩌면, 그것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다.


 산 위에서 그렇게 고함을 지르고는 부끄러웠던 이유는 무얼까? 그건 당당하게 내 목소릴 내는 데에 익숙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설령 군중 심리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그들이 지르는 함성의 바깥에서 그 위로 고함을 지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월드컵 때 “한국 팀 져라!”를 당당하게 광화문에서 외쳤다간 성난 군중들에게 몰매를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그러나, 함성 밖에 못 지르는, 고함은 지르지 못하는 용기라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부끄러워할 일이다. 혼자서 고함을 지르는 일에 비교한다면 더욱 그렇다.



 나는 자유인이다, 괜히 현대, 대한민국이 다원주의이고 자유주의가 있는, 자유민주공화국인가. 감정도 생각도 없는 “야호-”가 아니라 내 목소릴 내자. 동조이건 반대이건, 함성에 휩쓸리지 말고, 함성 바깥에서. 사람들, 이제 홀로 고함 지를만한 키도 되지 않았는가. 멋들어진 말이 아니라도 좋다. 함성 바깥에 서서 여하간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진부한 명언-“너 자신이 되라.”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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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01.08 01:32
그냥 짤막하게...

2004년 여름즈음에 썼던 글인데요.

그 무렵에 나왔던 학교의 학생자치 신문, 혜윰에 기고된 글입니다.

혜윰, 은 생각하다의 고어인 혜다, 에서 나온 말로...
본래 혜염, 이 명사형인데...
혜윰이 되면 잡념이라거나 그런 느낌이라고 하더군요.
본 의도는 혜염, 이었는데 실수로 혜윰이 되었다나 뭐라나... 하지만 혜윰, 잡념도 잡념 나름이라는 게 제작진인 신문부의 변명 (-_-)


 

낭만주의적인 경향이라거나, 운동의 단초 같은 것도 보이는 글.
 

 

 

 

 

 

이상(理想) 없는 젊은이들에 고(告)함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의 유언장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기준을 이렇게 말했다. “이상(理想)적인 경향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창작한 인물에게 줄 것.” 노벨상이 “인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는 상임을 생각해보면, 노벨은 문학 분야에서 인류에 공헌하는 것은, 이상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 셈이다.

  비단 문학 분야만이 아니다. 이상(理想)이 없었다면 시민 혁명도 없었을 것이고 민주화 운동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 역사에 생동력이 있는 것도 사람들에게 이상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움직이는 힘은 현실과 이상의 대립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국 교육의 문제가 이거다 저거다 말이 많지만,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바로 현실주의자만 많이 길러내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당장 현실에서 시험 보는 데에 필요한 공부만 하려하고, 또한 미래 목표도 너무나도 현실적인 학생들이 산재해 있다. 사실, 한국의 교육은 과거 “산업 일꾼” 찍어내기 교육에 근거하고 있고, 또 그 방식은 과거 독일 쪽의 “군인” 찍어내기 교육에 그 기반을 두고 있으니, 이상주의를 죽이려는 경향은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 민태원 씨가 쓴 수필, 청춘예찬을 보면 알 수 있듯이 ― 청춘의 꽃은 이상이요, 청춘의 정열도 이상에서 나오는 것이고, 젊음의 찬양받을 점은 그러한 이상을 품고 있단 것임을, 또 낭만, 이상이 없이는 공부든 뭐든 무의미하고 수동적이며 강박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교육 현실에 저항하면서라도 이상을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이라고 해서 너무 거창한 것만 생각하진 말자.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꾸미겠다던가, 아름다운 사랑을 하겠다는 소박해 보이는 이상도, 물질 만능주의가 만연한 이 세상엔 얼마든지 훌륭한 이상일 수 있다. 이상이라 부를 수 없는 이상은 단 하나, “주어진 현실에만 잘 순응하며 사는 것”과 같은 ‘현실주의적 이상’ 뿐이다. 그런 건 아무 능동성도, 힘도 없다.

  현실을 도외시하라는 게 아니다. 다만 이상이 첫째고 현실은 둘째인 삶을 살자는 것이다. 우리는 청춘이다. 공부를 해도 이상을 위해 정열적으로 하는 것이 젊음이다. 가치 있는 이상 없이 살던 젊은이들이여, 그 이상이 세계 정복이어도 좋고 이런 허황된 글 쓰는 인간을 암살하는 것이어도 좋으니, 이상을 품자. 정체되고 잘못된 현실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건 수용하자”는 식으로 살지 말고 아무리 어려워 보여도 현실에 도전하자. 그것이 개인의 진정한 개성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자타가 모두 의미 있다고 인정하는 삶을 만드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교육이 이상을 죽인다면, 그 교육에 도전하자. 현실을 바꾸는 건 바로 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라는 점을 항상 명심하길 바라고, 또 바라며 글을 마친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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