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142

시 - 정전기

정전기 춤을 춘다 머리칼이 하늘하늘 춤을 춘다 흔드는 바람도 없고 손대는 사람도 없이 자기끼리 하늘하늘 속삭인다 혼자서 위태한 몸을 맞대고 어디로도 흐를 수 없는 감정을 혼잣말로 하늘대는 삶을 배웠다 하얀 겨울은 고요하지만 검게 먹먹한 머리카락은 들리지 않는 정전기 내 귀만 따갑게 오랜만에 싸이 미니홈피를 뒤지다가 발견한 시... 스스로 그렇게까지 맘에 썩 들진 않아서 블로그엔 안 올렸었나? 여하간 옛날에 썼던 기억은 어렴풋이 난다.

어설픈꿈 2009.02.09

울지도 모른다

종종 불 꺼진 고독이 나를 짓누르는 듯할 때도 나는 울고 싶지 않다 자주 피로감에 선 채로 졸다가 지하철에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때조차 팔다리가 뻣뻣하더라도 나는 울고 싶지 않다 문득 너의 살내음이 그리워져 한기가 들 때도 나는 울고 싶지 않다 다만 어느 지나치게 조용한 밤, 내 손에 잡히는 게 psd나 hwp 파일 하나 뿐일 때 나는 울지도 모른다 추억이라고는 하나도 엮이지 않고 어느 누군가가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밤에 나는 울지도 모른다 아직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다면.

어설픈꿈 2008.12.20

수필 - 옛 친구들과의 만남에 대한 두려움

옛 친구들과의 만남에 대한 두려움 예전에 동창회 가입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글을 쓴 적이 있다. 그간 몇 번 동창회니 동문회니를 오라는 연락이 왔지만 전부 다 가지 않았다. 한 번은 계속 연락을 해오는 담당자(누군지도 모르지만)가 안쓰러워서 어차피 저는 안 가니까 문자를 안 보내시는 게 절약일 듯하다는 답장을 보냈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문자가 오던 걸로 봐선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성격이신가보다. 고등학교 때 친구를 우연히 만났는데 동창회 이야기를 하기에 적당히 벗어나려고 "나도 가고 싶은데, 바빠서 시간이 영 안 나네."라고 립서비스를 한 적이 있는데, 약간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여기에서라도 말해둔다. 여하간에 동창회야 그렇다쳐도, 내가 예전에 한 번 친한 친구들의 모임이나 내가 친하게 ..

어설픈꿈 2008.11.24

시 - 너는 홀로 촉촉했다

너는 홀로 촉촉했다 너에게 손을 대면 촉촉했다 때로는 파랗게 때로는 빠알갛게 감추지 못한 습기들이 묻어나왔다 비는 오지 않았다 너는 샘처럼 홀로 촉촉했다 숨막힌 개구리가 뺨을 비비며 울어도 비는 오지 않았고 너도 울지 않았다 켜켜이 쌓여둔 습기를 너는 단지 홀로 숨쉬고 있었다 ------------------------ 초안에서는 빠알갛게 가 아니라 바알갛게 였지만 빠알갛게로 고쳤다.

어설픈꿈 2008.11.23

태양이 빛나는 밤에, 추천 글-

문학동네에서 "태양이 빛나는 밤에"라는, 김진경 씨가 쓴 청소년소설의 추천글을 부탁해서 쓴 짧은 추천글... 솔직히 추천글은 거의 안 써보고 비평글만 써봐서, 비평처럼 되어버렸지만;;; 근데 이거 벌써 공개해도 되나? 에이 원고 본문 공개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태양이 빛나는 밤에 뒤표지에 이 추천글이 다 실리는 것도 아니니, 이렇게 올려둬도 별 문제 없겠지;;; 문제 있으면 문학동네 분이 덧글이라도... 쿨럭 근데 문학동네가 생각해보니까 최근에 '혀' 표절 문제가 있고, 김진경 씨도 생각해보니까 예전에 전교조에 쓴소리한답시고 뻘소리 좀 했던 사람이고 -_-; 소설도 딱 100% 맘에 드는 건 아닌데 현재 이명박 정부 하에서 일정한 의미가 있고 뭐 그렇게 나쁘진 않아서 추천의 글을 썼는데 흠;; 쓰고 나..

어설픈꿈 2008.11.18

시 - 지하철 안에는

지하철 안에는 지하철 안에는 시선이 희박하다 희박한 시선에 시선의 희박에 사람들이 질식할 법도 하건만 살아남은 우리는 허약하다 지하철 안에서는 허가받지 아니한 잡상인의 물건을 구입하지 말라고 짐짓 존댓말로 겁을 줄 때 허가받은 광고들은 시선을 쫓아낸다 도망친 시선들을 좇아가는 건 조금씩 떨고 있는 아픈 물방울 - 서울 지하철에서는 얼마전부터 지하철 기초질서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지하철 내 성범죄 근절 같은 것들은 당연히 환영할 일입니다만... 그 기초질서 항목들 속에는 폐지를 수거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며 신문을 지하철에 놓고 내리지 말라고 하거나, 허가받지 않은 상인 분들의 물건을 사지 말라고 하거나, 구걸하는 분들에게 동정을 하지 말라고 하거나, 그런 것들도 있습니다. 저는 ..

어설픈꿈 2008.10.25

시 - 흘러가기

흘러가기 너에게로 가는 길이면 유독 버스는 침착하게 흘러간다 버스에 실려서 간다 나는 때론 실려서 흘러가는 것이 불안할 때도 있다는 걸 안다 종이에 받아쓴 도로의 굴곡은 묻어둔 신음들의 질곡이 되고 어느새 질곡은 기울어진 바람이 된다 어제부터 휘청이는 바람이 너와 나 사일 비껴가는 바람이 바람을 맴도는 말들이 타인의 고통에 관한 말들이 켜켜이 쌓여오는 말들 속에 감정은 습관처럼 화석이 되고 무겁게 휘어진 눈꺼풀 틈새를 뚫고나오는 샘물은 다만 너에게로 흘러가려는 마음이었다 ------------------------------------------------- 몇 개월 전에 "켜켜이 쌓여오는 피로감 속에 / 감정은 습관처럼 화석이 된다 / "라는 구절만 생각하고 나서 주욱 메모해뒀다가 너무 짜임새도 없고 ..

어설픈꿈 2008.08.29

시 - 에스컬레이터

에스컬레이터 검은 계단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발 아래로 숨어드는 계단들 노란선을 밟고 있던 사람들은 넘어지듯 주춤주춤 떨어지고 사라지지도 숨지도 못하는 게 그 사람들의 신발이다 계단은 좁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사라진 계단들은 지구의 반대편을 다시 돌고 계단 바닥 너머에는 거울은 아닌 신발들이 비치고 있다 그러나 사라지지도 숨지도 못하는 한 만날 수 없이 안내방송에 맞춰 넘어지듯 걸어가는, 미끌거리는 신발들

어설픈꿈 2008.07.16

시 - 7시42분과

7시42분과 7시42분은 희미한 신음소릴 흘리고 있다 그때 그는 익숙하게 흘리던 신음소리가 기관지 오른쪽에 매연처럼 달라붙는 걸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7시42분엔 째깍대는 신음소리가 고여 있다 한눈금 한눈금 건너뛰는 마른 통증들 찡그린 주름살 같은 눈금들 폐를 찌를 때 악몽에 시달리던 꿈들을 깨워야 한다 7시42분에 꿈들은 자살한다 자살보단 섹스라는 충고는 꿈들에겐 소용없다 누군가가 엄격히 그어둔 1초 1분의 눈금을 넘지 못하고 매연을 마시고 질식사한다 매연에 목을 매단다 이 모든 게 7시45분에 시로 쓰여진다 시는 5분씩 건너뛰며 자살한 꿈들을 징검다리 삼는다

어설픈꿈 2008.04.19

시 - 시대착오

시대착오 봄에도 낙엽이 많았다 소양강 댐에서 보았던 철조망 앞에서 농성하던 낙엽들 삐라처럼 구겨진 얼굴들이 시멘트 표면을 굴러다니며 썩지 못한 꿈으로 모여 있었고 계절에서 소외된 꿈들을 철조망 뒤의 사람들은 밟지도 줍지도 않고 있었다 봄에도 낙엽이 많았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서 우린 모두 시멘트 바닥에서 검게 검게 물들고 있었다

어설픈꿈 2008.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