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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감옥에서 10 - 2013년 6월 20일

감옥에서 10 - 2013년 6월 20일 하늘이 너무 무거운 날이야 쏟아지는 햇살도 1기압의 대기도 삶의 가장자리마다 묻어온 우울의 냄새도 너무 무거워 땀이 나 얼마나 삭혔던지 군내가 나고 시어진 땀 아주 잠깐은, 세상을 용서하고픈 맘이 고였던 적도 있었어 당신이 내 안에 찍어논 발자국엔 나를 속였던 배신의 감촉들도 내게 박혔던 교정의 못질들도 용서할 수 있었던 맘, 세상이 날 용서치 않더라도 그러나, 저토록 좁은 하늘이 너무나 무거운 날이야 발자국의 높이도 뭉개질 만큼, 맘은커녕 땀만 나올 만큼, 귀퉁이마다 묶어논 자유의 매듭도 끊어지고 용서하기엔 하루가 너무나 무거워 하루 아래서 거듭 예리해진 나의 삶

어설픈꿈 2013.08.17

시 - 감옥에서9 - 괜스런 죄스런

감옥에서9 - 괜스런 죄스런 귤껍질을 찢다가 소름이 돋았다 주황색 귤도 살구색 나도 내가 뜯어낸 하얀 살점들의 울음이 목덜미를 훑고 메아리쳤다 귤껍질에 돋아있는 소름의 의민 두려움인지 아픔인지 원망인지 괜히 죄스러워 입을 닫았다 죄스러움은 언제나 괜스러웠다 나는 다음에도 귤껍질을 찢을 테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나에게 사과받을 이들이 저 멀리 어딘가 많다는 소문이 돌았다 귤껍질보단 좀 덜 뜻밖이고 좀 더 나와 닮은 하지만 역시 나와 다른 사과할 이들도 없는 데서 죄인이 돼있다 나 역시 괜스레 찢겨지고 있다 찢겨짐은 대개가 자연스러웠다 사람들은 다음에도 나를 잊을 테니까 그리움이 인삿말이 될 테니까 아파함도 언제나 괜스러웠다 그러니까 내가 사과할 이들도 소문보단 가까이에 여전히 있을 것 같았다

어설픈꿈 2013.08.17

시 - 과거형

과거형 나는 당신을 사랑했었다. 그것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이 말을 할 땐 꼭 었, 하고 혀로 잇새를 닫아줘야 한다. 더 이상 외롭지 않게 과거로 과거로 만들어야 한다. 했다도 아니고 했.었.다 하고 두 번 그 닫히는 순간이 나의 마침표다. 엇 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었 하고 한 음절을 덧붙여 발음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 나는 당신을 사랑했었었었었었다

어설픈꿈 2012.02.23

시 - 자유는 어째서

자유는 어째서 6년만의 친구와 작별의 인사 나누고 돌아보니 하늘이 보이고 푸으른 겨울 하늘 눈에 스민다 수감을 한달 앞둔 맘에 저민다 그래서 느낀다 자유는 어째서 푸른색인가 수십일을 광장으로 출퇴근하며 달리고 때리고 싸우고 외치고 충혈된 눈들이 새벽을 밝힌다 주홍색 촛불도 피를 흘린다 그래서 느낀다 자유는 어째서 붉은색인가 배우고 있다 자유는 어째서 청록색인지 노란색인지 보라색인지 검은색인지 살빛인지 민트향 껌에서 여행지의 흙에서 저녁놀 등진 새 그림자에서 영화관 조명에서 네 등의 까슬함에서 자유는 어째서인지 총천연색 낯빛의 서글픔으로 나에게 인사한다 수감을 앞둔 시간 시간마다 -------------------------------------------------------------- 부제로 병역거부..

어설픈꿈 2012.02.18

시 - 새치

새치 김광석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내 곁을 떠나갔노란 노래를 떠올리며 나는 맨날 웃어 보여야 했으니 떠날 만하다는 그런 하찮은 생각이 묻은 손으로 잠든 너의 눈꺼풀을 쓰다듬는다 너는 내 앞에서 참 많이도 울었다 나도 네 앞에서 참 많이도 울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힘들 때 울었는데 너는, 내가 힘들 때, 울었던 거 같다 그래서일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새치가 딱 하나 숨어있다 머리칼을 뒤져봐도 없는 새치가 왼편 눈썹에 딱, 한 가닥 숨어있다 나 때문에 항상 애쓰는 눈물샘 눈꺼풀 그리고 눈동자 발갛게 물들곤 하는 흰자위 그 수고로움을 시위하듯 나 때문에 색이 바랜 새치가 네 왼쪽 눈썹에 피어 있다 ----------------------------------------------------------..

어설픈꿈 2011.09.26

시 - 눈물은 핑하고 돈다

눈물은 핑하고 돈다 눈물은 "핑-"하고 돈다 왼이마가 찌릿하고 떨려오면서 "핑-"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눈물이 눈동자를 돌고 있는 것 "쿵"처럼 거창하지 않으며 "우직"하고 갈라지지도 않는다 그저 "핑-"하고 남은 여운이 보이지 않는 눈물로 흐르는 것이다 운동을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그냥 사는 거였다고 말하는 그의 대답을 읽었을 때 "핑-" 눈물이 돌았다 그 높은 곳에 있는 그는 몇 번을 이를 "악" 물고 "핑-"하는 소리를 참았을까 돌고 도는 눈물 눈물을 흘리는 것을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설픈꿈 2011.06.30

시 - 당신은 언제나 왼쪽에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왼쪽에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왼쪽에 있었다 잠든 머리가 기울어진 순간에는 왼어깨가 알수없이 간지럽곤 하였다 당신은 언제나 왼쪽에 있었다 당신의 아직 흘리지 않은 눈물이 어깨 위를 두드리며 간지럽히곤 뭉친 살덩이를 건드리며 스쳐갔다 당신은 언제나 왼쪽에 있었다 눈을 감아도 고개를 돌려도 간지러운 어깨에 헛깨비처럼 당신의 숨결이 울고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왼쪽에 있다 어쩌면 그건 내가 언제나 오른쪽을 고집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설픈꿈 2011.05.09

시 - 이름 없는 증오, 까닭없는 얼굴

이름 없는 증오, 까닭없는 얼굴 굳어가는 혈관에 소주를 맥주를 채워넣던 친구가 갑자기 물어본다 네 증오의 색깔은 무엇이냐고 나는 내심 당황하지만 태연히 아마도 피처럼 검붉지 않겠느냐고 생각이 나는 대로 말한다 돌아오는 길에 묘한 정적이 머리 속에 들려올 즈음 깨닫는다 내 증오에는 이름이 없다는 걸 그러므로 색깔도 없다는 걸 동시에 너의 얼굴이 까닭없이 떠오르고 내가 미끄러지는 이 대로변엔 시작이 없다 동작이 없다 다만 그저 요컨대 예컨대 달려가던 길고양이들만 우연히 차마 이름을 줄 수 없는 내 증오와 아무 까닭도 없이 눈을 뜨고 있는 네 얼굴

어설픈꿈 2011.04.26

시 - 자화상

자화상 몇살부터일까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자신의 얼굴을 그리지 않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시청을 지나 서울역을 지나 용산을 지나 신림을 지나는 어느 버스 안에서 밤빛 유리창에 비스듬히 비치는 빗방울 돋아난 우리의 얼굴을 보면서 삐죽빼죽 알록달록 잘만 그리던 우리의 얼굴이 언제부터 백지 앞에 막막한 무언가가 되어버린 건지 눈을 믿지 못하게 된 건지 손을 믿지 못하게 된 건지 그리지 못할만큼 추하게 되어버린 건지, 우리의 얼굴이 우리가 서로를 탓하는 사이 눈에서 뺨에서 귀에서 코에서 입에서 여드름에서 흉터에서 돋아난 빗방울들이 빗겨 흐른다 우리 모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 누구도 자신의 얼굴을 책임질 수는 없는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설픈꿈 2010.09.02

시 - 옷에게는 고향이 없다

옷에게는 고향이 없다 삐그덕,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이불 위에 던진다, 아무렇게나 우리가 헤집고 다닌 먼지들 우리가 그려온 몸짓의 흔적들 그 모든 것이 주름진 옷으로 내 곁에 눕는다 나처럼 팔과 다리와 가슴과 배와 구멍을 가진 옷은 이마를 찡그리며 더 많은 주름을 삐그덕 찡그리며 내게 말을 건다, 아무렇게나 주름 한 점 없던 날은 없다 그리던 하늘이 높푸른 고향은 없다 당신은 태어날 적 흘렸던 눈물과 피범벅이 된 머리통 주름투성이 미간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우리에겐 고향따윈 없다는 말과 머무는 곳 어디든 고향이란 말은 닮은 듯하면서도 사뭇 다르지 않은가 나는 눈가에 배꼽에, 주름을 어루만진다 뱃속에서도 소리가 난다, 삐그덕 던져진 옷은 다시 말을 걸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다시 주름투성이 ..

어설픈꿈 2010.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