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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비의 이유

비의 이유 내 한때 묵묵히 무거운 몸 이끌고 이곳저곳 떠돌면서 햇살과 바람과 발작소리 말소리 웃음소리 울음소리 모두를 내속에 담아두려만 했다 그러나 끝내 끝끝내 후두둑 무너지고 만 것은 무너져내리고 만 것은 어제밤 달무리가 유독 아름답게 번졌기 때문도 아니요 개구리들 그토록 서럽게 서럽게 울었기 때문도 아니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롭게 흔들렸기 때문도 아니요 새들조차 고개 숙인 채 낮게 날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건 단지 내 혈관 하나 하나에 번져있는 누군가의 눈물들 증발한 눈물들 알콜섞인 오줌발로 튀어오르고 거리에서 물대포로 뿜어지고 땅 밑을 흐르며 들어야 했던 소리들 비명소리들 울음소리들 그런 것들이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일 뿐이었으니 후두둑 무너지는 것 그건 단지 다시 무너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떠돌고 ..

어설픈꿈 2009.04.15

시 - 낯선 얼굴 낯선 별

낯선 얼굴 낯선 별 내 곁에 누워 있는 얼굴은 오직 낯선 얼굴 낯선 얼굴 낯선 얼굴 뿐 어떡하면 꿈이 덜 무서워질까 낯선 얼굴은 낯설기에 말이 없다 한구석에 등 댈 땅을 포기하고서 별 하나 없이 불투명한 밤을 헤아린다 하나하나 눈을 뜨는 낯선 별들 어떡하면 꿈이 덜 무서워질까 어떡하면 별들이 덜 낯설어질까 얼굴에 난 머리칼들 헤아린다 머리칼들을 하나하나 뽑아내본다 한움큼씩 뜯어낸다 토끼풀처럼 너의 얼굴 구석에 겨우 낯익은 별 둘이 뜬다 농성장 당번이라서 농성장에서 밤을 보내던 때 초안을 잡은 시. 왠지 마지막이 좀 가학적으로 읽힐지도?; 하지만 그런 의미는 아닌데- 예전에 인터뷰할 때, 표 씨가 관계맺음은 어느 쪽에서인가 먼저 상처를 줄 수밖에 - 그러니까 폭력적인 개입을 감행해야 성립한다고 이야기한 적..

어설픈꿈 2009.03.06

시 - 2월 14일 신도림에서

2월 14일 신도림에서 0 죽음에 달리는 주석들이 지하철 가판대를 장식하고 말이 필요 없는 죽음이란 사치스럽기만 한 어느 날 한 세입자가 신도림역 앞을 걷고 있네 1 검붉은 아스팔트 위에 늘어서 밋밋하게 으르렁대는 차들은 신도림 영등포 노량진을 지나 용산까지 가고 용산에서 으르렁대는 경찰버스들도 검붉게 도열한 전의경들의 구호도 차들을 밟고 밟고 메아리쳐오네 주석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본문보다도 더 길게 외치고 있네 2 구석진 어디는 축축하게 썩어가는 반지하 닫을 수도 없는 창문 너머로 선명한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면 죽은 척하는 매년 2월 말이면 골목골목을 떠도는 세입자 벼룩시장을 기웃거리는 벼룩 같은 삶은 500만원 뚜껑 아래서 폴짝이고 있네 3 여기저기 주석이 달린 죽음들과 검붉은 정체 골목골목을 ..

어설픈꿈 2009.02.21

시 - 정전기

정전기 춤을 춘다 머리칼이 하늘하늘 춤을 춘다 흔드는 바람도 없고 손대는 사람도 없이 자기끼리 하늘하늘 속삭인다 혼자서 위태한 몸을 맞대고 어디로도 흐를 수 없는 감정을 혼잣말로 하늘대는 삶을 배웠다 하얀 겨울은 고요하지만 검게 먹먹한 머리카락은 들리지 않는 정전기 내 귀만 따갑게 오랜만에 싸이 미니홈피를 뒤지다가 발견한 시... 스스로 그렇게까지 맘에 썩 들진 않아서 블로그엔 안 올렸었나? 여하간 옛날에 썼던 기억은 어렴풋이 난다.

어설픈꿈 2009.02.09

시 - 너는 홀로 촉촉했다

너는 홀로 촉촉했다 너에게 손을 대면 촉촉했다 때로는 파랗게 때로는 빠알갛게 감추지 못한 습기들이 묻어나왔다 비는 오지 않았다 너는 샘처럼 홀로 촉촉했다 숨막힌 개구리가 뺨을 비비며 울어도 비는 오지 않았고 너도 울지 않았다 켜켜이 쌓여둔 습기를 너는 단지 홀로 숨쉬고 있었다 ------------------------ 초안에서는 빠알갛게 가 아니라 바알갛게 였지만 빠알갛게로 고쳤다.

어설픈꿈 2008.11.23

시 - 지하철 안에는

지하철 안에는 지하철 안에는 시선이 희박하다 희박한 시선에 시선의 희박에 사람들이 질식할 법도 하건만 살아남은 우리는 허약하다 지하철 안에서는 허가받지 아니한 잡상인의 물건을 구입하지 말라고 짐짓 존댓말로 겁을 줄 때 허가받은 광고들은 시선을 쫓아낸다 도망친 시선들을 좇아가는 건 조금씩 떨고 있는 아픈 물방울 - 서울 지하철에서는 얼마전부터 지하철 기초질서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지하철 내 성범죄 근절 같은 것들은 당연히 환영할 일입니다만... 그 기초질서 항목들 속에는 폐지를 수거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며 신문을 지하철에 놓고 내리지 말라고 하거나, 허가받지 않은 상인 분들의 물건을 사지 말라고 하거나, 구걸하는 분들에게 동정을 하지 말라고 하거나, 그런 것들도 있습니다. 저는 ..

어설픈꿈 2008.10.25

임시 야간 숙소 (1931년) - 브레히트

임시 야간 숙소 (1931년) - 베르톨트 브레히트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

흘러들어온꿈 2008.10.02

시 - 흘러가기

흘러가기 너에게로 가는 길이면 유독 버스는 침착하게 흘러간다 버스에 실려서 간다 나는 때론 실려서 흘러가는 것이 불안할 때도 있다는 걸 안다 종이에 받아쓴 도로의 굴곡은 묻어둔 신음들의 질곡이 되고 어느새 질곡은 기울어진 바람이 된다 어제부터 휘청이는 바람이 너와 나 사일 비껴가는 바람이 바람을 맴도는 말들이 타인의 고통에 관한 말들이 켜켜이 쌓여오는 말들 속에 감정은 습관처럼 화석이 되고 무겁게 휘어진 눈꺼풀 틈새를 뚫고나오는 샘물은 다만 너에게로 흘러가려는 마음이었다 ------------------------------------------------- 몇 개월 전에 "켜켜이 쌓여오는 피로감 속에 / 감정은 습관처럼 화석이 된다 / "라는 구절만 생각하고 나서 주욱 메모해뒀다가 너무 짜임새도 없고 ..

어설픈꿈 2008.08.29

계약직- KTX 여승무원이 되고 나서, 어색한 휴식 - 김명환

계약직- KTX 여승무원이 되고 나서 김명환 KTX 여승무원이 되고 나서 나는 껌을 씹지 않는다. 컵라면도 통조림도 먹지 않는다 봉지 커피도 티백 보리차도 드링크도 탄산음료도 마시지 않는다 물티슈도 내프킨도 종이컵도 나무젓가락도 볼펜도 쓰지 않는다 눈이 하얗게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 아스테이지에 돌돌말려 빨간 리본을 단 장미 한 송이 받아들고 나는 울었다 내가 불쌍해서 한번 쓰고 버려지는 것들이 가여워서 눈물이 났다 제복을 입고 스카프를 두르면 어느 삐에로의 천진난만한 웃음보다 따뜻하고 화사하게 웃어야 했지만 웃으면 웃을수록 자꾸자꾸 눈물이 났다 사는 것이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구차하고 비굴하고 가슴이 미어질 줄은 몰랐다 KTX 여승무원이 되고나서야 나는 이 세상이 한번 쓰고 버려지..

흘러들어온꿈 2008.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