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순수를 망가뜨릴 때

공현 2008. 2. 2. 00:20

순수를 망가뜨릴 때


 눈의 이미지 중 하나는 순수함이다. 새하얗기 때문일까. 그 눈이 산성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래, 내게 눈은 순수한 시간이다. 특히 조금밖에 내리지 않은 눈은 소중할 수밖에 없는 순수한 순간이다. 더욱이 그것이 몇 줌 남지 않은 첫눈이라면. 눈은 순수하기에 망가져야 한다면 순수하게 망가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애초에 그리 오래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길어봐야 겨울의 한복판 일부에나 머무르는 눈인데, 그나마 있는 눈마저 순수하지 못하게 파괴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인 것이다. 온전히 순수한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 어렵단 것, 그리고 그 순수가 세상 속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 자체가 슬픈 일이건만.


 

 눈을 가장 순수하게 망가뜨린다는 것, 그건 바라보고, 생각하는 일이다. 눈을 보며 그 눈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하고… 추억하고… 미래를 꿈꾸고……. 공상에 잠긴다거나, 시를 쓰는 일,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면서, 음악을 만드는 일. 그런 것들은 내 의식 속에서 눈을 눈 자체가 아닌 다른 의미로 환원함으로써 눈을 망가뜨린다. 그러나 그 방법은 눈의 상태를 다만 내 영역에서만 망가뜨릴 뿐 다른 사람의 영역에서는 처음 내린 상태 그대로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순수한 것이다. 그래, 눈을 다른 사람이 재활용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에. 또한 그 일들은, ‘나’로서 행하는 일이기에 순수한 것이다.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자식, 어느 직장의 사무원… 그런 식으로 나를 묶고 있는 굴레들 이전에 뭐라 규정되지 않은, ‘나’ 자신으로서 하는 일이기에 순수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흔한 경우이자 그 다음으로 순수한 망가뜨리기는 아마 그 위를 지나가고, 그 위에서 뒹굴고, 뛰놀고, 그러면서 그 위에 흔적을 남기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소박하기에 순수하다. 그리고 또한 그 ‘나’로서 하는 일이기에 순수하다. 내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가는 데 내가 가진 여러 사회적인 자리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서 뒹구는 데에는 그저 몸뚱아리 하나만 있으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남는 흔적들은 나 자체의 것이요, 자연적인 것들이다. 그것이 사회적인 면에선 익명이기에, 오히려 그것은 자연적으론 본연의 고유한 흔적들이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영역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역과 공유하고 있는 눈의 존재를 망가뜨리는 일이어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될 수 없을 따름이다.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밤새 내린 첫눈이 나무 위와 지붕 위에 약간씩 남아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창문 앞엔 몇 평도 안 될 듯한 눈이 어쩐 일인지 그곳에만 남아있었다. 눈이라는 순수와 때로는 대립하는, 순수한 태양이 이미 눈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없애고 있었는데도, 그렇게 남아있는 걸 보면…. 요행히 태양 볕이 그곳만 비껴간 것일까. 하지만 감동도 잠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좀더 자세히 그 장면을 보았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안타까움과 울분, 슬픔, 그리고 동정이 뒤섞인 듯한 조금 미묘한 충격이었다. 겨우 겨우 살아 남아있던 그 자그마한 화폭엔 갖가지 이름들이 수식어와 함께 새겨져 있었다.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는, 칼자국. 내가 그걸 인지한 순간, 죄책감마저 느꼈다면 그건 과장된 감정일 것인가. 여하간, 그렇게 눈은 인간 사회의 ‘이름’들로 파괴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 날 아침 겨울 북서풍이 성난 듯이, 상처받은 눈밭을 얼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첫눈 위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첫눈에 대한 이기적인 기념의 마음인가? 자신의 존재를 그렇게 증명하고 싶은 것일까? 그 소중한 순수 위에 이름을 쓰고, 자찬하는, 혹은 남을 비방하는 문자를 새겨놓는 그 의도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아마 거기엔 나름대로 소중한 소망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남지도 않은 소중한 첫눈 위에 그런 짓을 하는 건 “너무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법한, 정말 욕심이 과한 행동이었다.
 그 ‘이름’이 사회인으로서의 나이지, ‘나’라는 보다 본연의 자아에 바탕한 일도 아니란 점은 나를 더욱 서글프게 만들고 만다. 어째서 자연의 순수를 그와 같은 급으로 대하지 않고 사회적 인간으로서 대하는 것일까. 이름, 그것은 사회가 우리에게 준 것이다. 그건 일종의 규정이자 저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아, 이름은 모든 사회적인 것들을 함축하는 굉장한 축약어이자 그만큼 많은 규정들을 담고 있는 굉장한 선고이다. 눈을 바라보며 그것을 대할 때 나 자신 또한 그런 것들을 벗어나 순수하길 바라는 것은 그리 사회적이지 못한 나만의 과욕 혹은 괴팍함일까.
 나는 사람들이 우선 인간이길 바랬을 뿐이다. 우선 ‘나’이기를. 이런 건 반사회적인가? 그러나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최소한 그러한 자연의 순수를 대할 때만은 난 여전히 사람들이 자기이길 바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사회인이기 이전에 ‘나’이길 바랄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