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안녕들하십니까? - 한국 사회를 뒤흔든 대자보들』 _ 안녕들 하냐는 그 질문은,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요?

공현 2014. 3. 21.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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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하십니까? - 한국 사회를 뒤흔든 대자보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글들 등을 모은 책이 나왔다. 이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요청을 받아서 급히 써서 보낸 글이 있었는데, 그 글이 책 막바지에 실려 있다. 다만 내가 책에 원고 싣는 걸 동의하는 서류 몇 가지를 까먹고 못 보내서 내 이름이 안 실렸다 -_-;;;; 책 제일 뒤에 이 원고(두 개로 나뉘어 실렸음)를 보시면 제가 썼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길.








안녕들 하냐는 그 질문은,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안녕하지 못하다고들 답을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더욱 안녕하지가 못한 기분이 듭니다.

  2013년에, 한 중학생이 코치에게 목검으로 ‘체벌’을 당한 뒤 죽음에 이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청소년이 가족에게 학대를 당하다가 죽은 사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맞아서’ 죽은 사건들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체벌금지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청소년들에 대한 폭력은 너무나 쉽게 정당화됩니다. 그리고 다들 너무나 안녕히 살아갑니다. 그렇게도 ‘학교폭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외치는 우리 사회이지만 말입니다.

  꼭 직접 때리고 죽게 하는 것만이 폭력인 것은 아닙니다. 청소년들의 생활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폭력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스마트폰 사용을 원격으로 감시하고 조종하는 각종 어플리케이션들, 청소년의 게임 및 인터넷 이용 등을 감시하고 규제하는 정책들, 청소년들의 정보를 마음대로 수집하고 이용하게 하는 ‘학교밖청소년정책’ 등. 청소년들의 생활을 국가가 학교가 친권자가 나서서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가며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에게는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바로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시험 성적을 높이기 위한 공부. 교육이 아닌 입시와 경쟁이 학교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선두를 다투는 공부시간 속에 청소년들에게는 쉬고 놀 시간조차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공부를 해봤자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없는 청소년들에게는 학교 수업시간이란 무의미하고 괴로운 시간 때우기일 뿐입니다. 성적 때문에, 입시 때문에, 공부 때문에 청소년들이 죽고 불행해져도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만 말합니다. 대학은 서열화되어 있고 성적으로 학교로 차별을 당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문제가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지만, 세상은 잘 변하지를 않습니다. 저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중고등학생들의 두발자유화를 요구하는 운동을 8년째 해왔습니다. 제가 하기 이전부터 있던 역사를 돌아보면, 약 15년은 두발자유화를 요구해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두발자유는 멀게만 보입니다.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는 몇 지역에서만 두발규제가 완화되거나 사라졌을 뿐, 다수의 지역과 학교들에는 두발규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두발자유 하나조차도 15년 동안 귀를 막고 들어주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에 살고 있어서 저는 도무지 안녕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참 안녕하게 살아갑니다. 두발자유 그런 것은 사소한 일이라고 하면서요.

  이번에 여러 청소년들이 ‘안녕들 하십니까’를 묻는 대자보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중고등학교들이 ‘안녕들 하십니까’를 묻는 그 대자보를 철거하고, 학생들의 의견 표현을 짓밟았습니다. 저 역시 고등학교에 대자보를 붙여본 적이 있었고, 징계를 하겠다는 위협도 당해보았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고서 언론의 자유가 없는 고등학교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언론의 자유를 외치는 청소년자유언론을 만들어 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항들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은 지금도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규칙과 편견에 막히고 기본적인 말할 자유조차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안녕들 하냐고 물을 자유조차 없습니다.


안녕들 하냐고 묻는 옆의 삐딱선에서

  제가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생각한 것은 내가 안녕하냐 아니냐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삐딱한 생각이었습니다. ‘안녕하냐고 묻고 답하는 대자보를 붙이는 데도 자격 유무가 갈리는 것일까?’ 누구는 대자보를 금지당하고, 대학을 거부하거나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들은 안녕하냐는 대자보를 붙일 마땅할 공간조차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자격’은 사람에게만 묻는 것이 아닙니다. ‘주제’에도 ‘자격’이 있습니다. 물론 철도민영화는, 노동자들이 해고당하는 일은, 농민들의 삶을 파괴하며 이루어지는 송전탑 건설은, 모두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되묻고 싶어집니다. 청소년들의 삶의 현실은, 모두에게 안녕하냐고 물을 중요한 일이 아니냐고.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각종 억압과 폭력과 차별을 받아야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어찌 안녕하실 수 있냐고 물을 이유가 되지 못하는 거냐고. 학벌과 학력과 성적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사회에서 여러분은 안녕들 하시냐고. “청소년들이 ‘체벌’이라며 여전히 폭력을 당하고 두발단속을 당하는 이 끔찍한 세상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이 어색하게 들리신다면, 안녕하냐고 물을 수 있는 ‘주제’ 역시도 이미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그래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습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차라리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제대로 물을 수도 답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사람들, 그리고 ‘안녕들 하십니까?’라며 모두의 문제, 공공의 문제랍시고 불려나올 수도 없는 문제들입니다. 정치에서 따돌림 당하고 있는 청소년 같은 소수자들, 그리고 공공의 문제라고 생각조차 안 되고 있는 현실들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적어도 청소년인권의 문제, 대학서열화와 입시경쟁의 문제 등을 가지고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그리고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로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서기 전까지는, 저는 안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살고 있는 저 자신을 사랑하기에 저는 참으로 안녕하고, 행복하기도 하겠지만요.)

  그러므로 안녕들 하냐는 질문에 대해 제가 삐딱하게 되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안녕들 하냐고 묻는 그 질문은, 정말 모두에게 묻는 것입니까? 모두가 물을 수 있는 것입니까?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