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

실수할 기회가 필요한 이유 - 겨울왕국 리뷰

공현 2014. 4. 4. 13:52

오늘의교육 19호에 쓴 겨울왕국 리뷰


http://combut.maru.net/xe/journal_list/2168





실수할 기회가 필요한 이유

(또는 '나이를 먹으면 자동으로 성숙해진다는 신화에 대한 반박')

- 『겨울왕국』(크리스 벅/제니퍼 리, 108분, 3D 애니메이션)

 


 


1000만 관객이 극장에서 본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원제 Frozen). 내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느낀 것은 일단 순수한 감탄이었다. 3D 애니메이션 기술이 이정도로 발전했다니! 머리카락 한 올, 눈송이 하나하나를 보다보면, 『겨울왕국』의 캐릭터들과 장면들을 표현하기 위해 제작진이 얼마나 많은 그래픽적인 노고를 들였을지 상상도 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캐릭터들의 표정은 풍부하고 눈짓 하나 미묘한 입가의 움직임으로 감정이 전달된다. 디즈니는 컴퓨터그래픽의 발전이 웅장함이나 화려한 특수효과가 아니라 섬세하고 꼼꼼한 표현으로도 하나의 경지를 이룩했음을 입증했다. 사람들이 『겨울왕국』 캐릭터들에 마치 실제의 존재처럼 몰입하고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었으리라. 물론 『겨울왕국』의 음악들도 빼놓을 수 없다. 「Let it go」, 「Do you wanna build a snowman?」 등 많은 노래들이 영화를 보고 나온 이후에도 사람들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시청각적인 쾌감을 흘려보내고 그 이야기를 곱씹어보면, 『겨울왕국』이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는 텍스트임을 느끼게 된다. 이야깃거리가 많은 텍스트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잘 완성된 이야기와 같은 뜻은 아니다. 『겨울왕국』의 이야기는 잘 되짚어보면 구멍이 많고, 전개에서 황당한 면도 있으며, 특히 마지막 부분은 당황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겨울왕국』은 그런 이야기의 구멍을 캐릭터의 매력으로 커버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이에 대해 아주 간명하게 정리했던 바 있다.

 “여기서 스토리의 유려함을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거의 조각이불과도 같은 상태니까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그게 큰 문제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그렇게 분절된 덩어리들이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해석을 통해 추가적인 의미를 부여 받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커지는 것입니다.
이게 가능한 것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아주 교묘하게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dcdc님 말마따나 다들 '덕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사람들인 거죠.” (www.djuna.kr 2014년 1월 30일)


 
설득력과 짜임새가 아주 좋다고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겨울왕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이 애니메이션을 누구는 성장담으로, 누구는 자매애로, 누구는 익살극으로 받아들였다. 『겨울왕국』이 『라푼젤』에 이어 전통적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여성상을 정면으로 깨고 있다는 점과 성소수자에 대한 은유로 읽히는 부분 등은 이미 많은 화제가 되었다. 『겨울왕국』의 엘사를 박근혜 대통령과 비교한 채널A의 무리수 같은 것은 소소하면서도 씁쓸한 우스갯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활동가인 나는 『겨울왕국』에서 청소년보호주의의 문제를 읽었던 것이다.

 

자신을 부정하고 숨기며 살아온 엘사

『겨울왕국』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엘사는 '아렌델' 왕국의 공주다. 엘사는 얼음과 눈에 대한 마법의 힘을 타고났다. 그런데 엘사가 어릴 적 동생인 안나를 실수로 다치게 한 사건 이후, '아렌델'의 왕과 왕비인 엘사의 부모는 엘사가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마법의 힘을 비밀로 숨기도록 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측이 된다. 하나는 엘사가 마법의 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엘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마녀라고 박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다가 부모는 그만 바다에서 사고로 죽고 만다. 엘사는 부모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고, 계속 자기 방 안에만 있으며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지낸다. 그리고 몇 년 후, 엘사는 21살에 여왕으로 즉위하며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엘사가 갑자기 마법의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엘사는 그날 처음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며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한 안나와 다투다가 무심코 마법의 힘이 튀어나와, 사람들에게 자신이 마법의 힘을 가졌다는 것을 들키고 만다. 사람들은 엘사의 힘에 놀라 엘사를 “마녀”, “괴물”이라고 비난하고, 엘사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서 튀어나오는 마법 때문에 사람들을 다치게 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패닉 상태에 빠진다. 엘사는 그대로 성 밖으로 도망친다. 호수를 얼려서 만든 얼음의 길을 따라, 북쪽 산으로. 그 뒤로 아렌델에는 폭주하는 엘사의 힘 때문에 여름인데도 눈이 내리고 추위가 찾아오게 된다.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아렌델에 찾아온 추위를 해결하고 엘사와 화해하기 위해서 엘사를 찾아가는 안나의 모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엘사가 자신의 마법의 힘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엘사의 마법의 힘이 엘사의 정신 상태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엘사의 부모가 엘사의 마법을 억제시키고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은 오히려 엘사가 자신의 힘을 컨트롤하는 데 서툴러지게 만들었다. 안나의 사고 이후에 엘사가 자신의 힘을 두려워하고 감추려 할수록 엘사는 더욱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점점 마법의 힘은 커져가지만 그것을 대하는 엘사의 정신은 더 불안정해지기만 했던 것이다. 실제로 엘사가 절망감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낄수록, 또 자기 감정을 억누르고 힘을 억누르려고 할수록, 엘사의 마법의 힘은 더 심하게 폭주하고 눈보라도 점점 더 심해진다. 마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더 큰 해악을 낳는다고 이야기하듯이.

사실 자신을 숨기는 것은 엘사 본인에게도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성을 뛰쳐나와 산 위에서 「Let it go」를 부르면서 엘사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자기 힘을 감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차라리 세상으로부터 떨어져서 혼자 살더라도 자유롭게 자신의 힘을 쓰면서 살겠다고 외친다. “And the fears that once controlled me can't get to me at all. It's time to see what I can do. To test the limits and break through. No right, no wrong, no rules for me. I'm free! (날 구속했던 두려움도 이제 날 전혀 잡을 수 없어. 이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알아볼 때야. 한계를 시험해보고 돌파하기 위해.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고 규칙도 없어. 난 자유야!)”

찾아와서 같이 돌아가자고 하는 안나에게, 엘사는 자신은 산 위에서 혼자서 자유롭게 살겠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신 때문에 아렌델에 추위와 눈보라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엘사가 자신을 억눌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자, 그때까지는 그래도 다소 진정되어 있던 날씨도 다시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엘사가 완전히 자신의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안나의 사랑이라는, 또 다른 계기가 필요했다.

 

나이를 먹으면 성숙해진다는 신화에 대한 반박


『겨울왕국』 속 엘사의 모습에서 나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겨울왕국』의 텍스트 속에는 청소년보호주의에 대해 굉장히 유효적절한 비판이 담겨 있다.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보자. ‘너희를 위해서’라며 학교 안에서 오로지 공부만 하며 지내다가 ‘대학 가고나서’, ‘어른이 되고나서’ 뭔가를 하라고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청소년들은 아직 미성숙하므로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하고, 집과 학교에서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하며, 나이를 먹어서 성숙해진 뒤에야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컨대 너희는 아직 미성숙하니 정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더니 스무살이 넘으면 정치에 관심도 가지고 투표도 열심히 하라고 하는 식이다. 술담배를 금지하다가 스무살을 넘으면 짠 하고 술도 담배도 스스로 알아서 잘 적당히 하기를 기대하는 식이다. 공부만 하면서 지내라고 하더니 나이를 먹고 나서는 ‘나이값’을 하라면서 자기 삶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윤리의식, 참여의식 등을 요구하는 식이다. 그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자동으로 성숙해진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반면 청소년들이 어떤 권리나 참여의 기회를 요구하면, 과연 니네가 잘 할 수 있겠느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마치 완벽하지 못하면 어떤 권리도 기회도 가져선 안 된다는 듯이.

그러나 엘사가 나이를 먹고 21살이 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힘을 자동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엘사가 자신의 힘을 숨기며 보낸 시간은 엘사의 상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엘사를 숨기며 길렀던 엘사 부모의 의도는 좋은 것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안나가 크게 다치는 것을 본 뒤에 엘사의 부모가 엘사의 힘을 감추고 컨트롤 할 수 있을 때까지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고 한 것은 자연러운 반응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겁을 먹은 엘사 부모의 양육은, 결과적으로 온 나라가 얼어붙는 더 큰 사고를 초래했다. 엘사는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엘사 때문에 성 안에서 몇 년을 갇혀 지냈던 안나 역시 그렇다. 만일 안나가 미리부터 다양한 연애경험을 해봤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애정에 굶주려서 연애에 대한 그릇된 환상을 품고서는 그날 처음 만난 남자와 몇 시간만에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나가 썸도 좀 타보고 밀당도 해보고 짝사랑도 해보고 실연도 당해보고 그랬다면, 좀 더 신중하고도 능숙하게 연애 관계를 꾸려갈 수 있지 않았을까? 청소년의 연애를 금지하고, 청소년들을 공주처럼 키우려고 하는 어른들이여, 기억할지어다. 그러다가 나중에 첫 눈에 반했다며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선언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이를 먹는다고 자동으로 사람이 능력을 가지게 되고 ‘성숙’해지지는 않는다. 엘사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기 방에 숨어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고 자기 자신을 두려움 없이 알아갈 기회였다. 그리고 동생인 안나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의 이해와 도움이었다.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 역시 ‘보호’를 핑계로 한 금지와 통제가 아니다. 나이를 먹기를 기다린다고 해서 청소년들이 자동으로 성숙해지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게 되지는 않는다. 청소년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것을 경험하고 자신을 알아가며, 때로는 실수하고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와 권리가 필요하다. 실수하더라도 그것을 함께 감당해주는 안전망과 지원이 필요하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뭐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이다. 청소년들은 설령 실수를 한다고 해서 엘사처럼 온 나라를 얼려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