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안전을 권리로 생각하기 : 학생인권과 안전

공현 2014. 6. 11. 13:49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공현 

다 시, 안전이 화두다. 과거에도 ‘학생간 폭력’(통칭 ‘학교폭력’)이 이슈가 되었을 때, 아동에 대한 성폭력이 이슈가 되었을 때 등 조금씩 다른 맥락에서, 그러면서도 주기적으로 학생의 ‘안전’은 수면 위로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다시 세월호 참사. 커다란 사고와 비극 앞에서 사람들은 다시 안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사고가 너무나도 압도적이기 때문일까. 안전교과 신설, 수영교육 강화, 수학여행 금지 등 쏟아져 나오는 여러 가지 대책들은 어딘지 공허해 보인다.



안전, 중요하지만 망설이게 되는

안 전할 권리는 분명 인권 중에서도 아주 중요한 권리이다. 안전할 권리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생명권도 건강권도 위협받게 될 것이다. 넓게 보면 안전할 권리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부터 위험에 대한 예방 조치를 받을 권리, 그리고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자유권의 영역과 사회권의 영역 모두에 걸쳐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안전’이라는 단어는 학생인권의 보장을 바라며 활동하는 사람들이 흠칫 거리를 두고 이야기하기 망설이게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안전’이라는 개념을 학생인권을 제한하고 약화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해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 학교 곳곳에 감시카메라(CCTV)를 설치해야 한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 소지품 검사를 해야 한다.

혹시 누군가가 위험한 물건을 가져왔을 수도 있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 학생들을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시키는 것(야간자율학습)도 괜찮다.” 

보 호라는 말로도 바꿔서 쓸 수 있는 이 말, 안전이 때로는 폭력이나 억압을 정당화하는 핑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해봤다. 많은 감시와 통제, 국가폭력 등이 안전(치안)의 이름을 앞세워 이루어진다. 이런 안전은 우리의 권리라기보다는 국가의 명분이다. 이때 국가는 안전을 책임지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의무를 다하기보다는, 무엇이 안전의 문제인지 결정하고 베풀 권력을 가지게 된다. ‘내(국가, 학교, 경찰)가 너희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해줄게. 내 말에 복종해.’ 게다가, ‘안전’은 생명권과 연결되기에 힘이 세다. 일단 다치지 않고 죽지 않고 봐야지 다른 인권도 보장될 수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 앞에 많은 권리들이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권리인 듯 권리 아닌 반쪽짜리 ‘안전’

 ‘권리 아닌 안전’이 가지는 한계는 명백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안전 문제의 대상을 선별적이고 편파적으로 정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가정에서의 폭력 때문에 집을 뛰쳐나온 청소년을 가정해보자. 경찰 등은 이 청소년을 가정에 돌려보내는 것이 그의 ‘안전’을 위해
우 선적으로 취해져야 할 조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청소년의 입장에서 가정은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 목숨과 신체가 위협당하는 공간일 뿐이다. 실제로 얼마 전 내가 만난, 친권자의 폭력 때문에 집을 뛰쳐나온 어떤 청소년은 집으로 돌아가면 뼈 정도는 부러질 것 같다고 심각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세간에서 주로 말하는 ‘안전’ 속에는 그처럼 일상적인 폭력의 문제들이 상당 부분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학생이 아픔을 호소해도 병원에 가도록 하기보다는 꾀병을 의심하고 학습을
강요하는 학교도, 가정도 과연 안전한 곳인가? 애초에 밤늦게까지 공부를 시키는 학교나
학원도, 과로 등으로 학생의 건강을 해치고 있는 위험한 곳 아닌가? 이는 안전의 문제를 당사자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정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 힘을 가진 다른 누군가가 대신 판단하고 결정하려 하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한계이다.

다 음으로, 안전을 권리로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안전을 위해 삶을 파괴당하는 역설을 겪게 된다. 영화 『데몰리션맨』 속에서는 안전을 위해서 삶의 모든 것이 감시당하고 정부에 의해 통제당하는 미래 사회를 묘사한다. 그 사회는 욕설 한 마디만 해도 바로 벌금 통지서가 날아들지만, 뒤집어 보면 그 사회는 욕설 한 마디를 할 자유조차 없는 사회이다.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상상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을 보라. 안전을 위해서 감시카메라(CCTV)를 달고, 안전을 위해서 게임을 셧다운하고, 안전을 위해서 수학여행을 금지하고 있다. 태안 해병대 캠프 사고가 난 후 국가가 안전을 위해 내놓은 방안은 청소년들의 수련활동을 정부에 사전신고해야만 할 수 있게 바꾸고 국가의 인증을 받지 못한 활동은 학교에서 갈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안전을 보장하는 방법이 온갖 것들을 금지하고 국가가 허가한 것만이 존재하는 단조로운
온실 안의 삶을 사는 것이라면, 그 안전이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하고 좋은 삶이 아니라 그저 살아있기만 한, 생명만을 남겨두는 것이 과연 안전인가?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것은 아닌가? 단지 살아있기만 하면, 우리는 안전한 것인가? 우리가 안전을 바라는 목적은 안전한 가운데서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안전할 권리를 되찾자

 

▲ 해병대캠프 사고가 났을 때 청소년단체들은 학생 당사자의 참여 보장 등을 요구에 포함시켰다.

청소년들이 위험한 명령을 좀 더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는 사회였다면 사고를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사진 출처 : 교육희망 최대현 기자)


다 시 세월호 참사로 돌아와보자. 나는 이 사건이 그 자체로는 ‘학생인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권’의 문제이기는 하다. 국가는 배의 과적을 단속하지도 못했고, 안전하게 설계된 배만 운항하도록 점검하지도 못했으며, 배의 책임자들은 제대로 안전교육을 받지 못했을뿐더러 위급할 때 올바르게 대처하는 책임감도 없었다. 사고가 난 직후에도 국가는 인명을 구조하는 데 무력했다. 세월호 승객들의 안전할 권리는 전체적으로 보장받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국가는 지금 수학여행을 금지하고, 안전교과를 신설하겠다고 하며, 세월호를 운 항한 청해진해운 그리고 해경을 희생양으로 올리려 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잘못했고, 처벌을 받고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사태 해결 방법이 안전을 개인의 몫으로 돌리거나(수영교육 강화, 청해진해운 악마화 등) 사람들을 억압하는 형태의 해결책(수학여행 금지)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전을 권리로 생각해야 한다.

안 전을 우리의 권리로 가져온다는 것은 각자도생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안전할 권리를 보장하도록 국가에게 적극적으로 의무를 지운다는 의미이다. 학교로 이야기하자면, 안전을 위해서 달리지 말라고 윽박지르고 감시하는 학교가 아니라, 달리다가 넘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고 툭툭 털고 일어나서 더 잘 달릴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고 안전 장비를 챙겨주는 학교가 더 낫지 않은가? 넘어져서 좀 다쳐도 누구나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학교를 만드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사고의 책임을 지시를 따르지 않은 학생에게 돌리기보다는 사고를
예방하고 그 피해를 함께 분담하기 위한 시설과 제도를 만드는 학교가 훨씬 안전한 학교가 아닌가? 수학여행을 금지하는 정부가 아니라,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든 안전을 담보할 수 있도록 시스템과 환경을 만들고 학생들이 여행을 즐길 수 있게 하는 정부를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안전할 권리’의 적절한 행사 방식일 것이다.

권리로서의 안전은 다른 인권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기 회를 가질 수 있을 때 더 안전해지며, 차별이나 폭력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하지 않고 평등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더 안전해진다. 안전을 위해서는, 불합리하고 위험한 상황과 명령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고 회피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안전이고 무엇이 위험인지, 평등하게 참여해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자의 편의나 이윤보다 안전을 위한 조치를 우선적으로 취하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안전을 국가나 치안 권력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권리로 찾아올 것을 꿈꾼다. 그리고 그것이 학생인권이 안전을 추구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일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