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청소년운동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공현 2014. 11. 27. 12:00


우물모임 발제로 끄적여본 것인데... 음

모임에서는 아수나로 기본원칙이랑 해서 읽으면 될 것 같다.




청소년운동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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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길을 돌고 또 돌아서 왔습니다. 1920년대부터 헤아려보면, 소년보호. 소년해방. 변혁운동의 선봉대. 청소년인권. 다시, 청소년해방. 또는 청소년운동. 1920년대의 소년운동부터, 1980년대의 고등학생운동, 그리고 청소년인권운동까지... 청소년운동은 보호와 해방과 변혁 사이에서 빙글빙글 맴돌며 자신의 궤적을 그려왔습니다. 저 역시 약 9년 정도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그런 과거들을 발굴하고 추적해왔고, 저 스스로도 많은 생각의 변화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쩌면 과거에 누군가가 섰을지도 모르지만, 제대로 기록되거나 알려진 적이 없는 어딘가에 이르렀다는 기분이 듭니다. 청소년운동이 무엇인지 그 정체성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순간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드는 걸까요? 저는 우리가 무언가를 손에 쥐기(파악把握)는 한 거 같은데, 이게 맞는 건지, 이걸 잡아가도 좋은 건지, 영 모르겠습니다. 항상 그랬던 것 같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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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운동’은 청소년해방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입니다. 청소년 자신의 자력화, 청소년들의 조직화, 청소년들이 주체이자 주축이 되는 조직의 건설 등은 청소년해방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청소년운동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청소년운동의 필요조건은 아닙니다.

청소년해방은 청소년들이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겪게 되는 억압, 폭력, 차별 등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단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겪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복합적인 정체성이 청소년이라는 조건/정체성과 연관되면서 일어나는 억압 역시 포함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청소년해방의 전선이 그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기구는 바로 학교와 가정입니다. 이는 더 나아가서 ‘미성년자’를 구분하고 그들을 열등한 존재로 대하는 사회, 그러면서 기존 사회 체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려 하는 국가와 자본주의 자체가 유발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간을 수단으로만 간주하고 경쟁, 배제, 차별의 정당화를 통해 운영되는 자본주의 사회는 청소년에게 억압적인 체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소년운동은 반자본주의적 운동입니다.

더 과감하게 나아간다면, 청소년운동은 자본주의보다도 더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이든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을 기존의 사회체제에 맞게 사회화시켜야 하고, 기존의 사회 구조가 억압적이라면 사회화의 과정 역시 억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더 명확하게, 법적으로, 비교적 더 높은 연령기준으로 ‘미성년자’를 설정하고 억압해온 것일 뿐, 그보다 더 전에도 미성년,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에 대한 억압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시대에 따른 양상의 차이가 매우 크더라도, 청소년운동은 ‘자본주의에 한정된 어떤 현상’(으로서의 청소년억압)에만 문제의식을 제한하는 운동이 아닙니다. 저는 청소년운동이 (일정 부분 추상적으로 보이겠지만) 성숙과 미성숙이라는 잣대, 기존 사회로의 사회화 과정, 기존 사회에 대해서 일부분 타자로서의 청소년-아이의 위치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변화를 제안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청 소년운동은 청소년(미성년자, 아이)이라는 소수자 집단의 해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소수자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문제의식이나 관점도 다른 소수자 운동들과 공통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청소년이라는 속성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고, 또 모든 사람은 한때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이서 청소년운동은 여타 소수자 운동과 다릅니다. (다른 소수자 운동도 그런 성격이 있지만,) 청소년운동은 사회의 구성원 재생산 과정이라는 구조적, 제도적, 문화적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운동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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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불안감은, “이래도 돼?”, “정말 이렇게 말할 수 있어?”라는 데서 오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청소년운동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생물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이나 과학적으로 증명된 여러 가지 사실들(아동의 미성숙성이라든지, 발달학이라든지)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을 바라보는 관점, 대하는 태도, 사회적 대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설명하고 싶지만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현실적으로 청소년들은 기존 사회에 대해서 완전히 타자가 아닙니다. 이 사회에 살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사회화가 되어있고, 또 비청소년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따라서 청소년 대중이 아주 급진적인 청소년운동의 문제제기에 동의할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그것이 기존 사회 체제를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그럴 것이고, 더 나아가서 미성년과 성년을 구별하는 사회적 장치 자체, 세대 재생산 과정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사회적 재생산이나 양육, 성장 등 그 자체를 부정하고 없애자는 것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런 것 자체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이해관계의 차이, 갈등에 대해 언급한 것을 놓고 세대간 협약을 부정하려 한다고 하는 소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 조직화를 통해서 어느 정도 이 부분을 해결해야 하는 것은 운동의 과제이지만, 조직화를 통하더라도 후자까지 합의를 만들어내는 게 가능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잡은 청소년운동의 근본적인 성격은 어쩌면 현실의 운동으로 나타나지 못하는 잠재적인 방향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잠재적인 방향성일 뿐이라면, 굳이 그것을 청소년운동의 성격이자 정체성으로 적을 필요가 있을까요? 더 혼란스러울 뿐은 아닐까요? 혹은 그런 방향성을 확실히 해두는 것만으로도 운동에 더 풍부한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