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자식 잃은 부모”를 벗어나자

공현 2015. 7. 25. 16:32




“자식 잃은 부모”를 벗어나자


- 세월호 참사를 말하고 기억하는 것 속에 있는 가족주의



※ 이 글은 청소년활동가들 다수의 입장이 아니며, 따로 활동가들 사이에 논의된 바가 없습니다.





  작년 가을쯤이었던 것 같다. 같이 활동을 하는 인권활동가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띄우는 편지 글을 작성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한 마디씩을 보태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딱히 할 말이나 전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참여하지는 않았다. 얼마쯤 후, 그렇게 만들어진 편지가 언론에 나왔다. 그 글을 읽고서, 나는 엉뚱한 데서 놀랐다. 글이 세월호 유가족을 ‘아이가 죽은 부모’로 전제하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을 지적하자 그 활동가는 이 글이 당시 농성을 하고 있던, 단원고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다가 죽은 이의 부모인 유가족들에게 전하는 글로 쓰여서 그랬던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역시 수신인을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고 쓰면서 은연중에 그런 전제를 가지고 썼다는 것, 그리고 쓸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나는 그 글 역시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어떤 맥락 위에서 쓰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자식 잃은 부모”라는.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의 투쟁, 그리고 이에 관한 논의들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이름이 있다. 바로 “자식 잃은 부모”다. 이 이름에는 사건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하나는 세월호 참사는 아이들, 즉 (안산 단원고등학교의) 고등학생들이 죽은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가족’들은 그들의 ‘부모들’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명제는 서로 이어져 있는 복합체이다. 사실 잘 관찰해보면 이러한 내용은 그렇게 명확하게 주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인 양, 기사에, 칼럼에, 사람들의 논쟁과 각종 표현에 등장하고 선언되고 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을 어찌 보상금으로 해결하려 하느냐는 항변, 그리고 세월호 참사에 관해 부모 세대를 설득하기 위해서 당신 자식이 죽었다면 어떨지 상상해보라고 말했다는 사례 등에서도 말이다.


  이것은 하나의 ‘프레임’이다. 조지 레이코프의 유명한 정의를 따오자면, 프레임은 “특정한 언어와 연결되어 연상되는 사고의 체계”이다. “자식 잃은 부모”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어떤 감정들, 개념들, 사고들, 이미지들이 연상된다. 그 프레임은 시민들에게 동정과 연대를 호소하는 데 효과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자식 잃은 부모” 프레임이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나는 유가족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자식 잃은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되며, “자식 잃은 부모”의 고통이 신성불가침의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것처럼 자리 잡은 그 속에 (기존 사회의 구조와 논리를 재생산한다는 의미에서) 보수적인 함정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월호 참사에 대한 해석은 “자식 잃은 부모” 프레임을 벗어나야 한다.



두 가지 한계와 그 이상

  앞서 말했듯이, “자식 잃은 부모”라는 말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이미지를 청소년, ‘아이들’로 정한다. 물론 모든 사람은 생물적으로 누군가의 자식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표현은 그 이상으로 희생자를 아직 부모의 양육, 보호 하에 있는 연령대의 사람으로 가정하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이는 비단 이 표현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다수의 말들과 ‘아이들의 방’ 등의 기획들에서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를 ‘아이들이 희생된 사건’으로 기억하는 것이 대세로 존재하는 것이다.


  몇 차례 언론들이나 단체들에서 지적이 나왔듯 이는 비청소년인 피해자들의 존재를 간과하거나 과소화하게 된다. 단원고 학생이 아닌 50여 명의 사망‧실종자들의 존재, 그리고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생계수단을 잃거나 신체적‧정신적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말들 속에서도 주변으로 밀려난다. 세월호를 “무고한 아이들이 죽은 사건”이라고 부르며 큰 문제라고 말하는 걸 듣노라면, 비청소년 피해자들은 무고하지 않고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을 순수한 피해자로 기억하는 구도는 청소년들을 보호 대상 및 피해자로만 무력화한다는 문제도 가지고 있다.


  청년좌파가 세월호 참사 약 한 달 후에 발표한 논평의 다음 구절은 기억과 윤리의 차등을 직접적으로 지적한다.
“세월호 참사를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추모집회에서 “우리 아이들”을 부르짖고, “아이들을 살려내라”고 말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어른과 아이, 한국인과 이주자를 가리지 않고 무참한 희생이 일어났건만 말이다. 우리는 혹시 “죽음”이 아니라 “아이들”의 죽음이 슬펐던 것 아닌가? 나머지는 “감수할 수 있는” 정도의 “숫자”였던 것 아닌가? 생명은 중요한가? 몇 사람부터?”
(「우리는 신전을 모독하고 역사에 침을 뱉기 위해 여기에 섰다」(2014.05.19.) http://yleft.kr/wp/?p=1063)


  또한 이처럼 ‘아이들’이라는 기표로 세월호 참사를 말하는 것의 위험성을 말한 오늘의 교육 21호 김현경의 글 역시 참고해볼 만하다.
“여기서 '아이들'이라는 기표가 국가주의에서 수행하는 독특한 기능을 상기하도록 하자. … 모든 정치 세력은 이 기표를 전유하려 애쓴다. 세월호에 아이들을 빼앗긴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독재자는 아이들을 내세우고 그들의 이름으로 말하고 싶어 한다.”
“세월호에 대한 국민적인 애도가 아이들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일반인들'이 소외감을 느낀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일반인들'이 부각되는 것은 그들이 아이들을 구조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 때뿐이다. 우리는 더 가치 있는 생명과 그렇지 않은 생명,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안타까운 죽음과 그렇지 않은 죽음을 무의식적으로 나누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전쟁의 관점이다. 전쟁은 공동체의 심장과 손발, 살아남을 사람들과 희생될 사람들을 나누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재난은 점점 전쟁을 닮아 간다. 하지만 세월호의 트라우마는 우리에게 재난에 대처하는 더 나은 방법을 찾기에 앞서 전쟁의 관점 자체와 단절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아이들'이라는 기표 - 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https://www.dropbox.com/s/4694ln15rttjpq6/%2892-101%29%EA%B8%B0%ED%9A%8D_%EC%84%B8%EC%9B%94%ED%98%B8_%EA%B9%80%ED%98%84%EA%B2%BD.pdf?dl=0)




  두 번째로 “자식 잃은 부모”라는 말은 유가족을 ‘부모’로 한정한다. 유가족, 희생자와 연관성을 주장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부모’가 된다. 희생자들이 생전에 가지고 있었던 형제자매, 친구 등 다양한 관계망보다 부모와의 관계가 가장 1차적이고 중요한 지위를 가지게 되며 유가족으로서의 발언권 역시 부모가 우선적으로 가지게 된다. 이게 심하면 어떤 때에는 ‘자식’은 ‘부모’에 부속된 존재, 부모의 일부로 인식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희생자보다도 그 ‘부모’에게 더 감정이입,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4월 5일, 세월호 희생자 형제‧자매의 이름으로 공동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시행령 폐기를 촉구하며 “엄마 아빠의 동료가 되어 진실에 다가갈 것”이라고 밝혔다. 반가운 목소리이지만 내 마음 다른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들은 왜 지난 1년 동안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까? ‘부모’들과 달리 나서지 않았던 이유는?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집회 현장에서, 언론에서, 우리는 희생자의 형제‧자매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은 분명 유가족이었음에도 ‘유가족’이 아니었다. 그들이 함께 있는 순간에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유가족’의 이미지와 이름은 “부모”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작년 여름 단원고 생존 학생들의 도보 행진 역시 일회적인 사건이자 안타까움의 대상으로만 지나쳐오지 않았던가. 사고를 경험하고 그로부터 생존한 그들, 동급생 또는 친구를 잃은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더 분명한 당사자일지도 모르는데도 말이다. ‘부모’들이 주된 유가족 주체로 불리고 행동하게 되는 그 사회적 맥락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자식 잃은 부모”의 프레임 속에서는, ‘아이들’의 순수성이 강조되는 것만큼이나 “부모”의 고통도 매우 특별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자식 잃은 부모”의 심정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 극도로 존중받고 조심스럽게 대해져야 할 무언가로 취급된다. 유가족들 자신도 간혹 자신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할 거라고 말하곤 한다. 이처럼 유가족의 심정은 신성하고 불가침적인 것으로 격상된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적절한 일일까? 그러한 신성시는 한편으로는 소통과 공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게 하며 그 결과 차단과 고립을 낳는다.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고통을 품고 있는 존재 앞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동은 오직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뿐이다. “자식 잃은 부모”라는 프레임은 동등함을 부정한다.


  물론 세월호 참사 발생 이후 지금까지, 정부와 정당들, 언론들과 일부 시민들의 행태를 보면 우리 사회가 “자식 잃은 부모”를 신성하게 대하고 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적지 않은 이들은 유가족들을 ‘속물’로 끌어내리고 위선자라고 공격하기에 급급하다. 미디어스 김민하 기자는 ‘보수세력’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성소수자, 세월호 유가족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뒤에 ‘통속적인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폭로’를 원하며, 이런 이해에 근거하여 비난과 왜곡에 나선다고 분석했던 바 있다.(미디어스, 김민하 기자, 「보편적 인권 이해 없는 그들은 통속적 답에 안도감을 느낀다 - [기자수첩] 그들이 '성소수자'에 몰상식한 이유」(2014.11.28.)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708)


  친지가 죽은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이 최소한의 존중조차 받지 못하고 왜곡과 날조로부터 보호를 요청할 지경에 처한 것은 끔찍하면서도 서글픈 우리 사회의 ‘반동’적인 현실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동’에 저항하여 ‘상식을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의 답이 될까? “자식 잃은 부모”가 얼마나 괴로울지 동정하고 경외하라고 하며, 그러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면 될 문제일까? 일베 등에서 반복되는 사건을 보다 보면, 어쩌면 속물화하려는 욕망의 밑바닥에는 그러한 신성화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식’은 보수적인 개념이며 극우적 반동은 경우에 따라선 보수적 체제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자식 잃은 부모” 프레임이 품고 있는 다른 억압과 배제의 전선이 존재한다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아동기와 모성, 그리고 가족주의

  “자식 잃은 부모” 프레임은 어떤 점에서 보수적이고 문제인가? 이 프레임은 가족주의를 배경이자 뿌리로 하면서 가족주의를 재생산한다는 혐의가 짙다. 가족주의란 부모와 자식 사이의 생물적 관계를 중심으로 한 근대 핵가족제도의 이데올로기이다.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시민들의 정서나 담론에 가족주의의 영향은 짙었다. 아마 좀 더 정량적인 수집과 분석이 필요할 테지만, 일단 개인적인 경험에만 근거해서 이야기하자면, 세월호 참사를 해석하고 감정이입을 하는 측면에서 차이가 생기는 변수 중 하나는 그 사람이 출산‧육아의 경험이 있는지, ‘부모’인지 여부였다. 부모인 사람들은 ‘아이들의 죽음’에 대해 훨씬 깊게 감정이입을 하는 경향이 있었고, 보호주의적이거나 가족주의적인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리고 그런 반응에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보거나 비평하려는 태도에 거부감을 보이는 것도 더 심했다.


  가족주의는 그리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생활 방식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지고 기획된 것이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도 그렇다. 가령, 김제동이 했다고 알려진 “자식 먼저 잃은 사람을 이르는 단어는 없습니다. 아마 그것(슬픔/심정)을 말로 표현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라는 말은 거짓 신화다. 나는 실상은 정 반대라고 생각한다. 부모를 잃은 자식은 생존이나 사회적 지위에 곤란을 겪게 되므로 그런 상황에 놓인 이들을 따로 구분할 말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사회생활은 자식에 의존적이지 않으므로 자식을 잃은 부모를 부를 말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근대 이전의 영아 사망률은 매우 높았으므로 (19세기 영아사망률은 1000명당 100~200명을 넘나든다.) 상당수의 부모들은 자식이 죽는 걸 겪어본 부모들이었다. 오히려 3년 상 등 “부모 잃은 자식”이 더 불쌍하고 슬픈 것으로 취급 받던 경우도 있었다.


  지금과 같은 ‘아동기’, 아이의 이미지는 모성 이데올로기와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 이후의 아이의 이데올로기와 모성 이데올로기는 한 쌍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함께 가족주의의 고갱이를 이룬다.

“착취를 근간으로 하는 산업자본주의사회에서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고, 보호받을 필요가 있으며, 연약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라는 언표의 이면에는 ‘그토록 귀한 이를 지켜내야 할 누군가’가 있다. 이때 특히 소중한 존재가 아이일 때는 사회와 국가의 책임보다 가족의 개별 책임, 그(부모) 중에서도 콕 집어 어머니(여성)의 책임이 강조된다. 백지와 같은 어린아이를 일차적으로 보호하고 지켜야 할 존재는 여성, 어머니라는 모성 이데올로기는 사회 곳곳을 관통하고 있다.”

(조주은, 「아동기의 신화 속에는 무언가가 있다」,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물론 세월호 참사에서는 여성의 모성이 특별히 강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좀 더 포괄적으로 ‘부모성’이 강조되고 있고, 온 사회가 부모-자식의 구도로 그려지고 있다. 수많은 비청소년들이 ‘어른으로서’, 그리고 ‘부모로서’의 미안함과 책임감, 바꿔 말하면 자신들의 주체성을 선언하고 나섰다. 군인들이 여성(어머니, 여동생 등)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복무 의의를 확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족과 그 가족 안의 관계는 자연스럽고도 기초적인 것으로 합리화되기 쉽고,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쉽다. ‘아이들’이 보호의 대상으로 부상하고 어른들이 주체가 되는 구도는 단지 나이에 따른 편견에만 의한 것이 아니며 가족주의, 그리고 이를 온 사회를 가족의 논법으로 이해하려는 확장된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가족주의는 더 강조되고 공고해지는 듯하다.


  가족주의는 일정한 정상가족 모델, 롤 모델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아버지-딸/아들은 정해진 역할과 위치가 있고, 가족 내의 관계는 평등보다는 위계로 짜인다. 다르게 말하면 억압이고 차별이기도 하다. 결정권과 책임을 지는 것은 가장(家長), 혹은 부모이고 자식(청소년), 여성 등과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또한 비록 세월호-가족주의가 혈연 가족을 넘어 사회 전체가 하나의 가족이라고 말하는 것 같더라도, 그 근간에는 각자도생, 자기 가족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있다. “당신 자식이 죽었다면”이라는 공감 유도의 출발점은 결국 ‘자기 자식’인 것이다. 가족주의적 접근은 최종적으로 어른들 전체의 아동 보호를 대리하는 국가기구의 역할을 요구하게 된다. “‘아이들의 안전’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세월호에 대한 담론은 안전을 지켜 줄 수 있는 더 효율적인 국가기구와 더 성실하고 헌신적인 공무원을 요구하는 것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김현경, 위의 글)




자연스러움?

  세월호 참사에 대해 공적으로 발언할 때는 말을 고르게 된다. 일전에도 세월호 참사를 언급한 내 글을 보고 내 공감과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비난한 사람이 있었다. 분명 내가 세월호 참사에 상대적으로 냉정한 것은 내가 이런 이야기에 천착하게 되는 정서적 배경임을 인정한다. 나는 “자식 잃은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고 싶지 않으며,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모르는 경험을 한 타자에 대한 당연한 조심스러움과 공존과 예의, 대화의 노력을 가지고 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가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이라서 그런지, ‘교육의 실패’ 문제인지, 공감 능력이 대체 뭔지, 이야기거리는 많겠지만 그런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자. 아니면 그건 내가 상담이라도 받으며 카운슬러와 해결해야 할 일일 것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인지 자체도 잘은 모르겠으나.


  나는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를 볼 때 감정적인 것을 일부 덜어내고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것이 ‘부모로서’의 정서라면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신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인데 왜 그것을 존중해주지 않느냐는 반응도 돌아오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치면 “자식 잃은 부모” 프레임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접하고 그 속의 가족주의를 느낄 때마다 배제나 불편함을 느끼는 것 역시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이다. ‘자연스럽다’라는 것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인 형용사다. 감정을 존중해달라는 요구만큼이나, 그 감정의 출발점과 도착점이 어디인지, 즉 어떠한 배경과 맥락에서 비롯되며 어떠한 사회적 효과를 낳는지를 검토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나의 슬픔이나 감정은 사회구조나 상황과 상관없는 순수한 것이라는 믿음은 누구도 가질 수 없다. 또한 “자식 잃은 부모” 프레임을 비판하는 것이 친지의 죽음을 겪은 슬픔이나 잘못된 구조에서 비롯된 참사에 대한 분노를 평가절하 하는 의미인 것도 아니다.


  “자식 잃은 부모”라는 말이 대표하는 프레임은 희생자들을 주류와 주변으로 나누고, 유가족을 주류와 주변으로 나누며, 가족주의적인 구도를 포함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좀 더 보편적인 접근법, 사회구조적인 접근법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또한 그 길이 우리가 좀 더 구체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감정과 경험과 삶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이 되리라고도 믿는다. 그러려면 일단 지금의 담론이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고수할 수는 없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방어 장치를 넘고 나면 그것이 무언가를 간과하거나 사회의 보수적, 차별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는지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