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꿈

감사와 의무와 보상심리

공현 2017. 10. 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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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답잖은 이야기부터. 나는 한때 택시에서 내릴 때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하자니 내가 문을 열고 내려서 가는 입장 같았고,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자니 택시는 머무르지 않고 떠나는데 계시라고 하는 게 어색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달한 타협점은 바로 감사합니다였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참 많이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그중 상당수는, 서비스나 상품을 교환하는 거래 관계에서 말하게 된다. 일전에 어차피 그 사람들도 일로서 하는 거고 돈을 주고 거래하는 건데 왜 감사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틀린 말이야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것에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한테 필요한 이런 서비스와 상품을 마침 알맞게 팔아줬다는 것이 그 사람의 의도나 지불한 답례()와 상관없이 감사한 점도 있을 터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명목적 거래 이상으로 그런 사소한 에누리를 주고받는 것이 좀 더 우리의 관계와 삶을 낫게 만들지 않던가. 매사에 (신에게) 감사하며 살자는 종교적인 이야기나 긍정주의적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공리주의적인, 사회적 관계와 의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다. 무상 증여, 선물은 인간 사회의 근간에 있는 원리 중 하나니까. 인사말과 약간의 호의 표시 정도는, 부당 증여가 아니라면야 얼마든지 무상 증여할 수 있다.

 

2

그건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으니 네가 고마워할 건 없고.’ 예전에 탈가정을 해서 다른 지역에서 멀리까지 와 며칠 내 집에 얹혀살았던 청소년활동가에게 했던 말이다. 몇 년이 지난 뒤에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때 정말 고마웠다고 새삼 인사를 하기에 이렇게 답했던 것이다. 그렇다. 탈가정을 한 청소년활동가에게 집 한 켠을 내주는 것은 나에게는 활동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특별히 감사받을 일이 아니다.

왜냐면 그런 상황이 상대방의 곤궁함, 특히 사회 구조에 따른 곤궁함에서 비롯되었으며, 나는 바로 그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해 운동을 하는 활동가이기 때문이다. 이를 일종의 활동가로서의 직업윤리라고 해도 되겠다. 나는 간혹 청소년인 청소년활동가들이 교통비도 없는 사정을 호소할 때 2, 3만 원씩이라도 활동에서 번 돈(교육비나 원고료 등) 중 일부를 부치고는 하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것은 정치적인 연대이지, 개인적인 차원의 기부나 호의가 아니다. 스스로 희생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가 동의하고 힘쓰고 있는 운동을 위한 것으로, 도움을 받은 청소년을 위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의례적 인사로서 감사를 표하는 거라면 그냥 천만에요하고 넘어가면 말겠으나 새삼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하면 사양할 수밖에.

칸트를 연상시키는 소리일 텐데, 이상적으로는 이는 나의 동정심이나 이익에 대한 관심이 아닌, 내가 정한 의무를 이행하고자 하는 의지만으로 하는 행동에 해당한다. 따라서 의무를 이행한 것을 나의 선량함의 증거로 삼거나, 다른 이가 나에 대해 고평가하고 보답해야 할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나의 원칙에 대한 충실함의 증거가 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게다가 다른 이가 내가 주로 문제 삼고 바꾸려고 하는 사회 구조적 이유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이에 연대했다고 해서 그가 나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질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공평하고 관계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능하면 청소년인권 보장에 동의하는 이들이나 활동가들이 이러한 윤리를 공유하길 바란다.

 

3

이렇게 나란히 놓고 보면 묘한 역설이다. 특별히 감사할 일이 아닐 때는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인사받는 것이 더 낫다. 하지만 정말로 어떤 희생이나 도움이 있을 때는 감사하다고 하는 것의 무게가 달라진다. 만약 누군가의 순전한 호의나 도움을 받았을 때는 감사를 표하고 가능하다면 보답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 관계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와 정치적 연대와 윤리적 의무 등이 얽힌 문제에서는 좀 다른 규칙이 필요하다.

우리는 희생에 대해 보상심리를 갖기 쉽다. 나의 희생을 알아주길 바라고 감사해하기를 바라고 인정받기를 바란다.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거나, 때로는 상대방이 나를 떠받들어주기를 바라기까지 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정당한 기대이고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그러나 그러한 보상심리를 의식적으로 경계해야 할 때도 적지 않다.(자식에 대해 부모가 가지는 보상심리라든지.) 세상 일이 그렇게 돌아가지야 않지만, 운동을 하면서 운동의 내적 논리에 따라 연대하는 것, 의무를 행하는 것은 보상받을 일이 아니다. 기대할 수 있는 보상이 있다면 그저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의무를 공유하고 운동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것 정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