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축사 유감

공현 2017. 11. 4. 08:48

축사 유감

어제 《세상을 바꾼 청소년》 책 출간기념회가 있었다. 축사를 하는 역할로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 등도 축사를 하였다. 축사를 하는 사람이 6명인가 7명인가 여튼 많아서 나는 나름 신경써서 짧게 말을 줄였는데 조희연 이수호 두 분은 말을 참 길게 하시더라.

말이 긴 것보다도 조희연 이수호 두 분의 축사를 들으면서 내용이 꽤 마음이 거슬렸다. 일단 축사 내내 "여러분"이라는 말이 참 많이 나왔다. 특히 여러분이 ~해야 한다, 여러분이 ~하기 바란다, 여러분이 18세 선거권을 위해 나서야 한다... 그런 말이 적지 않았다. 축하를 하러 온 건지 훈계나 당부를 하러 온 건지 잘 모르겠다.

만약 내가 민교협이나 전교조가 뭐를 해 내서 축하하는 자리에 초대받아 축사를 한다고 상상해 보자. (나를 부를 리는 거의 없겠지만) 내가 그 자리에서 "교수 여러분이 ~를 해야 한다" "교사 여러분이 앞으로 ~하기 바란다", "교사 여러분이 앞으로 정치적 기본권을 위해 나서야 한다"라는 내용으로 축사를 채우면 참 어색할 것이다. 사회적 관례나 인삿말에도 많은 차별과 습관이 작용한다.

무엇보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자신은 1987년의 경험이 자기의 자부심이고 여러분도 2016년 촛불에 참여한 걸 평생의 자부심으로 가지라고 말했는데, 듣자마자 속으로 '그건 자칫하면 꼰대 되는 길이지;'라고 생각했다. 물론 역사적 승리의 경험은 우리에게 자신감이나 자부심으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집합적인 인민의 힘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부심이지, 자기 삶에 대한 자부심이 되어선 안 된다. 사람은 자기의 바로 지금 현재의 모습과 마주하고 그 모습에서 자부심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하지, 과거의 내가 이런 일에도 참여했다는 것을 안고 살면 반성의 동기도 약해지고 현재에 충실하기도 어렵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말이 집합적인 걸 말한 건지 개인적인 걸 말한 건지는 불분명했지만 87년이 자신의 자부심이라고 말했던 것 같아서 아무래도 개인적인 게 더 강하지 않나 싶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과 동년배인 사람들 다수가 1987년에 대해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두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런 사고방식을 전수하고 다닌다 상상하면 더더욱.

조희연이나 이수호 두 분에 대한 어떠한 억하심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 10~15분 남짓하는 축사를 들으면서 든 여러 생각들 중 일부이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에게 축사 외적으로 특별히 불만스러운 게 있다면, 18세 선거권만 자꾸 이야기하지 말고 교육감 권한으로 개입할 수 있는, 학교 안에서의 정치적 권리 보장을 위한 포부나 다짐이나 내실 있는 계획부터 내놓으시길 바란다는 것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