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

아동기의 신화 속에는 무언가가 있다 (by 조주은)

공현 2008. 4. 14. 02:01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조주은) 책 3장 중에서 발췌

 

(청소년인권운동 같이 하는 청소년들과 보려고 타이핑했습니다 헥헥;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되어서 출판사나 저자가 문제제기를 하면 삭제하겠습니다.)

 




아동기의 신화 속에는 무언가가 있다

      2003년, 대학 캠퍼스 구석구석에는 이라크 전쟁의 부당함을 알리는 대자보가 나붙고, 인터넷 공간 곳곳에는 전쟁에 관한 토론방과 사진, 동영상들이 넘쳐났다.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대자보에는 병원에서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거나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라크 어린아이의 사진들이 있었다. 전쟁의 폭력과 참상을 알리는 대자보 가운데 사람들을 가장 많이 모이게 했던 것은 피해 받은 어린아이들을 전시한 사진전이었다. 전쟁의 공포와 육체적인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라크 어린아이의 울음을 고통스럽게 지켜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스멀스멀 궁금증이 일었다. 이라크전의 피해자 중에는 여러 민간인이 있을 텐데, 왜 우리는 장애인이나 노인보다 어린이가 받는 고통에 더 민감한 걸까? 그리고 왜 그것이 집중적으로 부각되는 것일까?

     이것은 근대화와 산업자본주의의 싹이 트면서 부각되기 시작한 아동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관련이 있다. 16세기 전까지만 해도 아동, 어린이 같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이를 위해 고안된 장난감이나 특별한 이론들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작은 어른이었고 그렇게 다루어졌다.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어 계급이 분화되기 시작하면서 아동에 대한 이론과 상품이 쏟아졌다. 아동 관련 서적들의 모든 전제, ‘어릴 때 결정된다’류의 이론들과 그것을 자극하는 상품들이 그것이다. 몇 세 때 지능이 완성되고 몇 세 때 인격 형성이 마무리된다는 이론들은 결국 아이와 관련된 모든 문제와 책임을 이 시기에 아이와 함께 보내지 못한 어머니들에게 전가시킨다. 만약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못하거나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한다면, 혹은 지나친 말썽쟁이가 된다면, 그에 대한 일차적인 원인은 어린 시기에 아이와 함께 집에 머물면서 적절한 자극과 애정어린 보살핌을 주지 못했다고 간주되는 어머니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게다가 완벽한 아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의모든 어머니들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반성 중이다.

     어린이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특별하고 섬세한 보호와 훈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아동기의 신화는 일하는 기혼 여성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여성들은 ‘제일 중요한 시기에 애하고 같이 있어줘야 할 것 같아서’ 입덧 때문에 정류장마다 내려 구토하면서도 견디며 직장을 계속 다녔건만 출산 후 기어이 사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아동기 신화는 일터와 삶의 공간이 분리되면서 가정에 남게 된 중간계급 여성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다.



근대의 제왕으로 등장한 어린이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각별한 보호와 애정의 대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안의 심각성과 폭력성을 ‘피해 받는 어린이’를 통해 가장 절실히 느끼게 될 때가 있다. 아내 구타의 심각성을 알릴 때 순진무구한 자녀가 받게 될 악영향을 이야기하고,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을 때 ‘단결 투쟁’이라는 네 글자를 빨간 머리띠로 두른 해맑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 그렇다. 따라서 이라크 전의 경우에도 이에 반대하는 논리로 힘의 정치니 신자유주의 세계화니 군수 자본가 따위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전시 상황에서 고통받는 소녀, 병원에서 붕대를 감고 고통스럽게 젖을 빠는 어린아이의 사진 한 장이면 반전 시위장으로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어린아이의 위치는 특별하다.

     착취를 근간으로 하는 산업자본주의사회에서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고, 보호받을 필요가 있으며, 연약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라는 언표의 이면에는 ‘그토록 귀한 이를 지켜냐애 할 누군가’가 있다. 이때 특히 소중한 존재가 아이일 때는 사회와 국가의 책임보다 가족의 개별 책임, 그(부모) 중에서도 콕 집어 어머니(여성)의 책임이 강조된다. 백지와 같은 어린아이를 일차적으로 보호하고 지켜야 할 존재는 여성, 어머니라는 모성 이데올로기는 사회 곳곳을 관통하고 있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과도한 밀착은 기혼 여성들이 노동자로서 정체성을 갖는 데 혼란을 초래한다. 기혼 여성이 자아 성취 욕구 때문에 어린 자녀를 떼어놓고 일하면 이기적인 엄마로 비난받지만, 갓난아이의 병원비 마련 등 어머니 노릇을 위해 노동을 하면 감동적인 일로 칭송받는다.

   

아동기에 대한 새 개념이 아이와 어머니 모두 해방시킨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아이들이 먹을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라는 온갖 이유들로 아이들 일상에 넘치는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이 넘치는 관심도 아이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도구적인 관심 아닐까? 장애인, 어르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비장애인 성인 남녀도 좋은 먹거리를 먹으며 우리 사회의 애정 어린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아동에 대한 각별한 보호와 투자를 해야 한다’는 논리 뒤에는 ‘아이들은 다음 세대를 책임져 나간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아이들은 미래의 일꾼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좋은 음식을 먹고 훌륭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비장애인 중심주의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장애 아동을 다시 배제시킬 위험성을 품고 있다. 더불어 어린이에 대해 과도한 보호와 애정을 강조하는 일은 어머니들로 하여금 불안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할 수 있고, 그런 보살핌을 받는 아동의 삶 또한 행복하다고만 할 순 없다. 아동기의 신화를 활용해 “내 아이는 달라요”라는 기치를 내거는 유아용품들은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에게 선택을 둘러싼 갈등을 안겨주는가?


     나는 이라크전과 한국군 파병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만 “단지 그곳에 어린이가 있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전시 현장에 있는 어런이는 전쟁 반대의 다양한 이유 중 하나가 되지만, 그 논리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또 다른 착취를 빚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아동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아동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동기의 발명으로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분리되었지만, 아동이 어른의 세계에 통합된다면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훌륭한 아이란 누가 어떤 기준에 의해 정한 것인가? 공부 잘하고 예의 바르다는 것이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로 채택될 수 있는 것인가? 좋은 어머니란 어떤 어머니인가? 좋은 아버지는 어떠해야 하는가? 아동(기)에 대한 정의는 변화하고 있는 시대 현실을 반영하여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새롭게 내려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