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낮은 눈높이

공현 2008. 1. 8.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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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아즈망가 ost cd 중 오사카 테마 곡 표지의 그림...?)




 

낮은 눈높이

 (2004.09.)


  현대. 자연과학에서는 미시(微示)적인 분야들이 한창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일상과 상식으로 무장된 우리들에겐, 유전자가 어떠니 원자가 어떠니 하는 이야기들이 실감으로 다가오질 않는다. 세포만 해도 실감이 안 날 정도로 작건만, 또 그 안에 들어있는 유전자라니. 차라리 완두콩이 쭈글쭈글하니 하면서 직접 보는 것, 겉으로 드러나는 형질을 관찰하는 쪽이 유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사과가 산소와 반응해서 맛이 달라지느니 어쩌니 하는 것보다는 그냥 갈색으로 변해서 맛이 달라졌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아무리 현미경의 성능이 좋아져서 분자, 원자 단위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해도, 사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혀 알 수 없는, 다른 세계 이야기 같다. 아무리 유전자 연구가 어떤 성과를 올렸다는 소식이 들려도,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유전자 연구로 인해 나온 결과, 즉 무슨 병을 치료하게 되었다, 노화를 방지하게 되었다, 와 같은 이야기이지, 유전자라는 그 조그마한 것을 다루는 그 자체는 아무리 유전자라는 개념이 친숙해져도 일상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이해할만한 것과는 조금 동떨어진 것으로 느껴진다. 일상과 상식의 울타리 안이 우리들이 실감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눈의 위치―시점(視點)을 움직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세계의 변화이다. 특히 횡적인 이동이 아니라 종적인 이동의 경우에는 더욱 그런 것을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다. 종적인 이동이란 것은 단지 높이의 변화 뿐 아니라 대상에 대한 밀착도의 변화이기도 한데, 횡적인 이동이 비교적 비슷하고 대등한 관점 사이에서 변화를 주는 것이라면, 종적인 이동은 시야 자체에 변화를 주기 때문에 실감에 직결된다.


  몇십층 빌딩 위에서, 혹은 비행기를 타고 높은 시점에서 부감(俯瞰)한 광경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시점을 낮춰서 미시한 모습도 또 다른 느낌으로 비현실적인 모습을 던져주기 마련이다. 현미경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들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 땅바닥에 엎드려 보기만 해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속 낮은 자세로 사람들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평소의 일어선 시점에서 본 것과는 다른, 묘한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구체적인 두려움, 어떤 사람은 단순하고도 막연한 이질감.


  그러나 그런 실감의 부재, 비현실감이 또한 매력으로 작용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게으른 성격의 내가 유독 청소에 집착하는 것은, 강박적인 성격도 원인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청소가 즐겁기 때문이다. 청소를 할 때에도 낮은 시점을 느낄 수 있는 탓이다. 청소는 눈높이에 있어 일종의 일탈(逸脫)로서 매력적인 활동이다. 특히, 그 청소의 대상이 우리가 가장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공간인 우리 자신의 방, 혹은 학교, 직장 등이라는 점이, 더욱 그런 면을 강하게 해준다.

  청소란 것은, 어느 정도 더러워지고 어지러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느긋하게, 하나하나 살펴가면서 하는 것이 좋다. 빨리 빨리 해치워버리는 건 그리 좋은 청소가 아니다. 빗자루에 걸리는 것들을 뭐든 신경 안 쓰고 쓰레기통에 몰아 넣어버리고, 걸레질도 휙휙 해버린다면, 청소의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청소를 하다보면 여러 가지 눈에 안 띄던 것들을 볼 수 있다. 바로 발 밑, 내가 그냥 건너다보던 창문, 책상 위, 여러 곳에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숨어있다. 걸레질을 하면서 창문을 보면 눈치채지 못했던 흠집이라거나 얼룩이 보이고, 걸레가 지나간 자국이라거나 손자국이 눈에 크게 들어온다. 허리를 굽히고 바닥을 쓸 때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눈에 띄고, 분필자국이라거나 발자국, 같은 것들도 보이곤 한다. 튀어나오고 긁힌 자국들이 보이면, 그런 자국들이 생긴 사건들을 떠올려본다. 거무스레한 얼룩을 보고 아, 언제 먹물을 엎질렀었지. 난리도 아니었어, 참. 굴러다니는 빵 포장지라도 발견하면 아 저건 언제 먹었던 거였지, 한다거나 누가 먹었었어, 하면서 회상을 해보고, 또 영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상상력까지 동원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본다. 그런데 저게 지금까지 남아있었나? 조금은 알쏭달쏭하다. 평소 별 생각 없이 밟고 다니던 바닥이 이렇게 생겼었나, 또 깨끗해 보이던 유리창이 이랬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손에는 걸레나 빗자루를 들고 바닥에 무릎을 꿇어보면, 이미 거긴 다른 세계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현실이 아니다.

  침대 밑을 뒤적거리면서 굴러가는 먼지 덩어리를 보면서 멍하니 있는 것도 즐거운 일 중 하나다. 잘 살펴보면, 먼지 덩어리들의 크기, 모양, 색깔도 제각각이고, 그 굴러가는 모습도 특색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먼지 덩어리에는 긴 머리카락이 엉겨있고, 어느 먼지 덩어리에는 빵 부스러기가 묻어있다. 조금만 상상력을 곁들여보면 먼지 덩어리에게도 개성이 있고 나름대로 꽤나 파란만장한 과거가 있다.


  그렇게, 조금만 눈높이를 낮춰보면, 여러 모습들을 찾을 수 있다.


  고개를 숙이고 걷는 버릇이 든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매일같이 걸어다니는 길바닥이 매일같이 얼마나 많이 변하는지, 그리고 또 변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우리의 눈에 던져주는지. 계절에 이르게 진 낙엽이라든지, 누군가가 떨어뜨리고 간 머리핀, 버리고 간 깡통, 달라붙은 껌자국. 져버린 꽃. 신발을 털어서 생긴 흙덩이들. 항상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던 불변의 일상, 그 안정적이던 세계가 계속 변화하는 무언가였다는 사실.

  아침. 길을 걸으며 바닥을 잘 보면 지렁이들이 보인다. 때로는 무언가에 밟혔는지 ―아마 사람일 것이다. 납작하게 죽어있는 모습도 보인다. 때로는 꿈틀거리면서 어딘가로 열심히 가는 모습이다. 때로는 개미들에게 공격을 받으면서 바둥대는 모습이다.

  한낮. 개미떼들이 걸어가는 사람의 발 밑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어떻게든 밟혀 죽는 걸 피해보려는 듯, 사람의 발이 바로 근처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갑자기 뽈뽈대는 게 빨라지는 까만 덩어리들. 좀더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면 표정까지 보일까?

  여름. 창틀 청소를 하면서 많은 벌레들의 시체를 보게 된다. 하루하루, 하루살이들의 시체들이 새롭게 창틀에 쌓인다. 그렇게 쌓인 수많은 하루들을 대수롭지 않게 빗자루로 슥 쓸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혹은 그러는 중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중 몇 마리는 꿈틀거리는 것을 알 수 있다. 빗자루를 대보면 날갯짓을 해보는 녀석도 있다. 그러나 쓸지 않고 한동안 그대로 두어봐도 끝내 날아오르지는 못하곤 한다. 어제.

  겨울. 겨울의 길바닥하면 빙판이라거나 얼어붙은 휴지뭉치 같은 것도 기억에 남지만, 역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눈이다. 얇게 깔린 눈 위에 남은 발자국들의 제각각인 모양들. 신발의 모양도 모양이지만, 그 발자국에 남은, 밀린 모양이라든가 걷는 모양새, 흙. 누군가가 눈을 뭉쳤는지 쓸린 눈. 후―하고 분 듯 날린 눈. 눈 위에 쓴 낙서.


  인간의 세계 바로 곁에, 인간이 자기도 잊어버려가며 남긴 흔적들이 생생하게 남아서는 그것을 남긴 인간과는 별도로 존재하고 있으며, 또 미처 인간이 신경 쓰지 못한, 인간과는 거의 무관하기까지 한 여러 삶들이 펼쳐지고 있다. 매번 다른 모습, 다른 세월들이. 그것이 우리가 눈을 낮췄을 때 펼쳐지는 이세계요, 현실 아닌 또 다른 현실이다.


  인간적이란 말은 애매한 개념이지만, 기계적인 것, 무정(無情)한 것에 대비되어 쓰일 때를 생각해보면,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지 않기 위해 도망 다니는 개미와, 몸부림치는 지렁이의 모습도 또한 인간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 이전에 생명인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느끼는 인간성은 사실상 생명으로서의 동질성일 것이다.


  높은 눈높이가 우리에게 신(神)적인, 초월적인 느낌을 준다면, 낮은 눈높이는 그런 미물(微物)적인, 지극히 지상(地上)적인, 또한 사소한 것에 대한 느낌을 준다. 낮은 눈높이에 익숙해진 인간은 보다 작고 근본적인, 또 개별적이면서 비재현성을 띤 모습들을 알 수 있다. 인간이나 벌레나 생명으로서는 크게 다르지 않고, 먼지덩어리도 존재라는 면에서는 인간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그러면서도 각자에게는 개성이 있다는, 그런 동정―공감을 느낄 수도 있다. 비현실적인 세계가 현실로, 기이한 실감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일상. 자신의 눈높이만으로 살면서 보는 좁은 세상에 비하면, 세상은 너무 넓다. 작아 보이는 책상도 그 주름 잡힌 부분을 모두 펴면 엄청나게 넓어진다고 한다. 그 주름 하나하나에 새겨진 세월들이 또 있다. 나무테처럼.

  현실이 조여온다고, 현실에 치이며 일상과 상식의 잣대만을 들이대다보면, 어느새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하기에 바쁘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데도 해야 하는 일은 뭔가 재미가 없다. 의무란 것만 무작정 짊어지다 보면 지치기도, 지겨워지기도 쉽다. 그럴 때면, 눈을 돌려보는 것도 좋다. 미물이라거나 작은 것들이라고 하면서 무시하기에는, 우리의 바로 곁에서 일어나는 삶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면, 낮은 눈높이를 가져보는 것이 결코 바보 같은 것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삶은 경험으로 풍부해지는 법이니까는.

  풀잎 위에 맺혀있는 이슬을 보면, 하늘이 있고 그림자가 있다. 이외수 씨의 소설 『칼』에서는, 이슬 속에 온 세상이 비치고 있다고 말했다. 나처럼 눈이 나쁜 사람 같은 경우는, 온 세상까진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먼 산 그림자와 자신의 얼굴 정도는 볼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