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

87년에서 배운다 - 촛불항쟁 경찰폭력 무력화시키기

공현 2008. 6. 2. 05:38
지금 87년 6월 항쟁에 대해 과제 때문에 조사 중입니다.
조사 중에 최근의 시위에 관해 참고할 만한 글을 발견해서 올려둡니다.

먼저, 경찰력을 마비시키려면 독하게, 질기게, 길게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는 6월항쟁 인터넷 기념 페이지에 있는 87년 6.26 평화대행진을 기록한 글 중 일부입니다.




전국 50개가 넘는 지역에서 150만 인파가 거리를 넘쳐흘렀다. 전국 34개 지역에 6만 전투
경찰이 전국 43개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당시 경찰은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잦은 전국적인 시위로 최루탄 재고가 바닥나 있었던 점이다. 건조 과정을 거치지 못한 쓸
모없는 최루탄조차 생산이 달렸다고 한다. 또 하나는 무더운 날씨와 장기간의 시위진압
작전으로 경찰들의 체력 또한 바닥나 있었다.
민통련 간부들은 가두시위의 베테랑들이었는데, 가두시위에서 시위대와 맞선 경찰의
취약점을 찾아냈다. 경찰은 앞에는 하급자들이 서고 뒷줄에는 상급자들이 배치되기 때문
에, 항상 병력의 후면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정보를 학생들에게 알려주자,
학생들은 거꾸로 기동대의 후면을 치고 빠지는 전술을 채택했다. 게다가 운동화를 신고
가볍게 뛰는 학생과 중무장한 경찰의 기동력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명준은 석동일의 자가용을 타고 함께 시위현장을 두루 살펴보았다. 석동일은 모 일
간지 사진기자로 있던 동생의 보도완장과 깃발, 표시판을 차에 붙이고 길 한가운데로 질
주했다.
국민운동본부의 주력들은 동대문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지만 이명준은 서울시내 전역
을 고루 살펴볼 수 있었다. 치고 빠지는 시위대와 이들을 지원하는 시민들 속에서 경찰은
무력화되고 있었다. 마침내는 시위대가 경찰을 무장해제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해찬은 무장해제되는 경찰을 학생들이 때리지 못하도록 지침을 내렸다고 할 지경이
었다.
전두환 정권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군대를 동원하거나 무조건 항복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비상조치로 군을 동원하면 일시적 진압은 가능할 몰라도 사태는 돌이
킬 수 없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6∙29선언이라는 위장된 항복카드를 뽑아들었다.
6∙29선언은 기만적인 사기극이었으나, 직선제를 얻었다고 만족한 정치권은 이미 선
거로 달려가고 있었고, 전국을 뒤끓었던 투쟁의 열기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직선제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의 길’은 그렇게 열리고 있었고, 7월 노동자투쟁은 따로
마련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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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위는 동시다발로 여러 곳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5월 31일 밤에 보니까 막 전북에서 올라와서 '전북도민여러분'어쩌구 하는 플래카드를 그대로 건 닭장차도 있더군요. 여러 지역에서, 그리고 서울에서는 여러 장소에서 동시다발로 진행해야 경찰을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래도 같은 글 중에 일부입니다.


최저의 행동강령수준은 쉽게 합의되었다. 불끄기, 경적, 종 치기1) 등 큰 이의 없이 합의
되었다. 86년 필리핀의 2월혁명과 국내 신민당 개헌현판식 때의 시민 참여를 고려하여
쉽게 정리되었다.
전국동시다발도 쉽게 합의되었다. 이해찬은 87년 2∙7대회와 3∙3대회의 경험과 함께
정보과 경찰들과 커피를 마시면서 흘려들은 정보를 정리하여 설명했다.

“시위를 막는 데 동원되는 경찰기동대는 3~4만이다. 이 기동대를 서울에 집중시키면 안 된다.
2∙7 때 세종로에서 집회를 하려다 기동대에 봉쇄당하자 시위는 막혀버렸다. 물리적으로 한 지역
에 집중하는 시위로는 경찰 병력을 뚫을 수 없다. 그래서 3∙3대회 때는 시위 전략을 전환시켜 동
시다발적 거점시위로 경찰 병력을 분산시켜 성공을 거두었다. 따라서 6월항쟁은 전국동시다발로
전국적인 거점을 마련하면 경찰 병력이 이동을 못 한다. 작은 시 단위, 예를 들어 천안, 안동처럼
시 단위 대학이 있는 곳은 시위가 벌어지면 최소한 1개 편제 480명을 묶어둘 수 있다. 이 전략으
로 대학이 있는 곳은 모두 시위에 참가하면‘시’자가 붙은 곳은 최소 5백 명~1천5백 명의 경찰
병력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이동을 하지 못한다. 지방으로 경찰 병력이 분산되어 서울은 2만 명이
넘지 못하게 한다. 160명 단위로 1개 중대가 편성되고, 3개 중대 480명이 1개 편제로 된다. 이 기
본편대 70개, 총 3만3천6백 명이 경찰기동대 총병력이다. 2만 명 정도의 경찰 병력으로 동시다발
적 시위를 서울에서 막을 수 없다. 서울역, 회현동(6∙10대회 당시 최대 격전지), 동대문, 신촌을
거점으로 시위를 하면 한 지역에 3~4천 명밖에 배치할 수 없다. 그 사잇길은 거의 무방비로 뚫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해찬이 분석한 경찰기동대 내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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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같은 사이트의 다른 글에 있는 내용입니다. 당시 실제 참가했던 사람들의 좌담회 중 일부입니다.

우상호 :실제로 학생들이 네 군데로 나뉘어서 집결하다 보니까 경찰력이 분산됐고, 처음
에는 수백 명 나중에는 1천여 명 정도가 안정적으로 집회를 할 수 있게 됐다. 7시 30분경부
터 앞으로 밀고 쭉 나갔는데, 신세계 백화점 앞이 확 뚫리면서 적게 잡아도 2만여 명 이상
이 그 일대를 완전히 점령했다. 퇴계로 쪽에서도 학생들이 밀려왔다. 전경들이 일시적으로
남대문 쪽으로 밀려난 사이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백화점 앞 분수대로 모여들었다.
야, 이겼구나 하는 생각과 자신감이 밀려들었다. 사방에서 환성이 터져나왔다. 현장에
서 시위대에 의해 고립됐던 전경 1개 소대가 무장해제 당했다. 헬멧과 방독면을 벗겨놓
고 보니 다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었다. 시위대는 최루탄 연기에 눈을 못 뜨는 그들을
분수대로 데려가서 세수를 시켰다. 그리고 모든 무기를 내려놓게 한 뒤 <아침이슬>을 함
께 불렀다. 노래를 따라 부르던 일부 전경들이 눈물을 흘리다 고개를 숙였다. 지켜보던
시위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김정수 실제로 지역별로 분산해서 집결하고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시위가 진행된 것이
도리어 열린 공간을 만들어준 측면도 있다.




http://www.610.or.kr/ 인터넷 6월 민주항쟁 기념관의 "6월항쟁을 기록하다" 자료 중에 있는 내용입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2008년 민주화 촛불항쟁(정확한 명칭은 역사가 정해주겠지요)에 시사점이 많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