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것같은꿈

우울한 키워드

공현 2008. 6. 28. 23:58
희망
희망으로 운동하지 말자. 희망으로 살지 말자.
희망이 있기에 그래도 우리는 투쟁한다고?
그럼 희망이 안 보이면 투쟁 접을 거니.
인간에게 바뀔 가망이 없어 보이면 운동 그만둘 거니.
바뀔 가망이 있다, 바뀔 가망이 없다, 그런 건 아무도 판단할 수 없어.
그저 지금 당장 행동하기 위해서 섣부른 판단들을 두는 것뿐이지. 주장될 수는 없는 판단들.
만약 정말 희망 때문에 운동을 한다면, 멀지 않은 시일 안에 운동을 관두게 될지도 몰라. 힘들거든.


감동
우리가 했던 몇 가지 경험들, 그래 소위 '감동'들을 일반화시키진 마.
오만하고 기만적이야.
네가 인지하고 싶어하는 것만이, 유의미한 가능성인 양 이야기하진 마.
그냥 네가 그 감동이 좋았다고, 그걸로 족해.
함부로 확장시키지 말자.


세계, 세상
내게는 세계나 세상이라는 모호한 개념이 잘 잡히지 않아.
흔히 이야기하는 세계란 건 뭘까. 너무나 안이한 개념은 아닐까.
그냥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묶어서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
내가 부딪치는 타자들에게 세상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
세상, 세계 그런 것들이 어떻다고 이야기하는 건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


대중, 민중
대중이나 민중이란 게 대체 뭘까.
그런 건 없는 게 아닐까.
다수, 라는 말이 오히려 더 정확할지도 모르지.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몇 % 정도인지, 몇 명 정도인지 쯤은 제발 말해달라고.
대중이나 민중이라는 말은, 죽은 말이야.
존재하지 않으니까.


냉혹함 혹은 무미건조함
삶은 냉혹하거나 혹은 무미건조한 거 같아.
아아, 내 삶 말이야.
이런 게 지식인의 유희니 관념이니 하더라도 말이지,
생활고에 쫓기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내게 삶은 냉혹하거나 무미건조해.
오히려 생활고, 생존, 착취, 고통, 감동, 희망, 그런 것들을 붙잡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의미로서는 냉혹하지도 무미건조하지도 않은 삶을 살아.


지금 여기 나
희망도 아니고 감동도 아니었어. 세상도 아니었고 따뜻함도 아니었지.
싸울 수밖에 없었어.
지금 여기 내가 그랬던 것뿐이었어.
희망이 있고 없고 가망이 있고 없고 그런 게 안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밖에 내 의미가 창조되지 않았어.
프레이리가 민중은 확신이 있을 때만 투쟁에 나선다고 썼던가? 민중이란 게 대체 뭔진 모르겠지만 그 확신이란 게 단순히 승리의 확신은 아닐 거 같아.



갈증
그래서 갈증인 거 같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다보면 간혹 혼수상태 같은 거에 빠져. 알아?
내 안에 있던 뭔가 강렬한 갈망 같은 게, 잠에서 갑자기 깰 때 솟구치는 거야.
수몰지역에서 가뭄 때 건물이 드러나듯이 단단한 갈증의 벽이 말야.
운동 안에서도 나는 삐딱해서,
목이 마른 거야.




(2007년 7월에 썼던 글이다. 그 당시에는 '희망'의 문제가 가장 큰 화두였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와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나는 신경질적이다. 그래서 심지어 나는 묻지 않았던가. "왜 '좌파'들은 내게 시비를 거는/질문하는 걸 좋아하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