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전쟁 꿈

공현 2008. 1. 10. 14:59

전쟁 꿈


 어제 밤이던가 그제 밤 정도였다. 꿈에 전쟁을 만났다. 꿈에서 전쟁을 만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명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강 기억나는 것에 약간의 살을 붙여보자면 이렇다.


 대체 어디와의 전쟁이었는지, 그런 건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았다. 나는 참전 같은 것은 하지 않았고, 내가 있는 곳은 그저 후방이었을 뿐이었고, 나는 그저 민간인이었을 뿐이었다.

 학교는 휴교 중이었고 하늘은 흐렸다. 후방. 전선은 저 멀리 있었고 이곳은 전쟁의 참혹함이나 끔찍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도시. 하지만 전쟁이란 전선에서 총을 쏘고 미사일이 나는 그런 단순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이 도시에는 폭격기가 날지 않았지만, 다른 주요 도시들은 종종 폭격을 받는다고 했다.

 비단 폭격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부족한 옷가지. 자주 일어나는 단수. 정전. 배가 고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식량도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식량부족 자체가 아니라, 식량이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TV에서 전해오는 전쟁의 소식 같은 것들도 믿을 만한 게 없었다. 보도는 계속 뒤집히곤 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지루한 연설을 늘어놓곤 했다. 몇몇은 거기에 열광하기도 했고, 몇몇은 거기에 지친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내내 거리를 돌아다녔다. 문 닫은 학교 주변, 집 주변. 치안은 그리 좋지 못했다. 소매치기가 극성이었고 계산대의 점원은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친구들도 소매치기를 했다. 편의점에서 도둑질을 하기도 했다. 하늘은 내내 흐렸다.

 어떻게 별 탈 없이 전쟁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학교에 나왔다. 그날 아침, 우리는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학교 앞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며 기뻐했다. 선생님도 기뻐했다. 친구가 내 얼굴을 보며 전쟁이 끝났는데 왜 즐거워하지 않느냐고 했다. 나는 대답 대신 말했다.

 "그거 알아? 이**군은 전쟁 중에 소매치기를 했어. 내가 봤지."

 친구는 당황하는 듯했다.

 "그때는, 시절이 험했잖아. 그걸 탓하긴 좀…"

 "그래. 시절이 험했지. 난 그걸 고발하거나, 뭐 탓하자는 게 아니야. 그저 우리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거야. 물론 나나 너는 소매치기를 하거나 도둑질을 하진 않았지. 하지만 말야. 전선에서는 이 나라가 소위 적군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죽었고, 또 국군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죽었지. 전선 근처의 도시에서는 민간인 사상자가 몇만 명이란 소문도 있지. 우린 그런 죽음을 딛고 여기 서있어. 우린 그런 죽음들을 막지 못했지. 오히려 그 희생을 발판으로 여기 서있지. 우린 모두, 죄인이야. ……. 그게 다, 시절이 험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지."

 다들 모인 그날에도, 학교에 다시 나온 그날에도, 하늘은 흐렸다.

 "전쟁이 끝난 건 기쁜 일이야. 더이상 죄가 무거워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미 짊어지고 있는 죄만 생각해도, 난 아직, 웃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런 게 전쟁인 거야."

 그러면서 나는 카도노 코우헤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에 등장하는, 부기팝이란 인물이 짓는 그 기묘한 좌우비대칭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왼쪽 눈을 가늘게 뜨고 오른쪽 입가를 올리는, 그 뒤틀린 표정을.

 친구의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 꿈에 겪은 전쟁이 대체 어디와의 전쟁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어쨌건 전후세대이다. 전후세대. 전후세대. 전후세대의 전후세대. 그 한참 후의 세대. 전쟁의 참혹함 같은 것은, 전혀 겪어보지 않았다. 커맨드&컨커를 하면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를 하면서, 화면 속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에서 재미를 찾고 영화 속 전쟁에서 박진감을 느끼지만, 어쨌건 진짜 내 목숨을 건 전쟁은 겪어보지 않은 세대다.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 건지 모르는 자이다.

 그래도 난 전쟁이 얼마나 슬픈 건지, 전쟁이 얼마나 괴로운 건지, 사진을 보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TV를 보고 조금은 느끼고 있다.

 한 급우에게 이 꿈이야기를 했더니 자신은 전쟁 꿈을 꿔도 전선에서 적을 죽이는 꿈을 꾸는데, 나는 그런 꿈을 꾸는 걸 보면 역시 성격 차이인 듯하다고 했다. 우리는 전쟁의 꿈을 꾸는데, 그 꿈이 슬픈 것인지 재미있는 것인지, 그 꿈 속의 하늘이 흐린지 맑은지, 그런 것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걸까….

 전쟁에 대해서, 현실이 아닌, 꿈만 꿀 수 있는 세상이기를, 뭐 그런 상투적인 방식으로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