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

아브라함과 이삭의 수난, 그리고 부모의 독재적 권리

공현 2008. 1. 10. 15:06

 어슴푸레한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높은 천장에 하나 가득 그려져 있는 낯선 프레스코화였다. 주제는 '아브라함의 수난'. 창세기에 수록된 에피소드다.
  아담의 자손인 아브라함은 어느 날 주님의 계시를 받고 아들인 이사악을 제물로 바쳐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두터운 신앙심을 지닌 그는 아들을 속여서 모리야 산 정상으로 데려간다. 아브라함이 제단에서 아들을 칼로 찌르려는 순간 주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칭찬하고 이것은 모두 너의 신앙심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성서에서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 알렉산드로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이 이야기가 '이사악의 수난'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수난'인 것일까. 가정교사에게 물어봤지만 그는 비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아마 그런 의문을 품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신뿐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모양이다. 번득이는 단검을 치켜든 노인의 모습을 반쯤 잠에 취한 채 바라보는 동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겨우 생각이 났다.


(요시다 스나오 지음, 김진수 옮김, 『트리니티 블러드 7 Reborn on the Marse Ⅳ 성녀의 낙인』 中)



  자식을 죽여야 하는 아브라함이 괴로웠으니까 아브라함의 수난일 터이다. 그러나 이삭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역시 무서웠을 것이므로 이삭의 수난도 될 터이다. '아브라함의 수난'이라는 일방적인 이름에는 이삭의 입장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은 독선적인 작명센스가 반영되어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매를 댈 때면 부모 가슴에는 피멍이 맺힌다고 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매를 댈 때면 스승 가슴에 피멍이 맺힌다고 한다. 실로 '부모의 수난', '스승의 수난'인 셈이다. 허허.


 누구 마음에 피멍이 들건, 일단 제껴두기로 하자.

  부모나 스승은 자식과 제자에게 가치관을 강요한다. 어쨌건 그들은 그 위치상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가치관을 강요하게 된다. 특히 자식과 제자가 미성숙한 상태일수록 모방이나 역할 모델이라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그것이 이루어진다. 또, 해당 사회의 예절이나 관습 등을 제재할 수도 있다. 잘못을 하면 혼을 내고, 잘하면 칭찬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조금 더 자라서 머리가 굵어지면, 이제 마찰이 일어난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는 특별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그런 것을 명령한 존재는 '신', 절대자다. 절대로 옳은 존재다. 하라면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현실에 저렇게 알기 쉽게 명령을 내려주는 절대자따윈 없는 듯하다. 부모의 가치관도, 스승의 가치관도 따져보면 다분히 상대적이다.


  물론 자식이나 제자가 범죄를 저지르거나 하면 말릴 수는 있다. 비단 부모나 스승의 입장뿐 아니라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조건이랄까. 그리고 그것은 명백하게 사회가 힘을 통해 강제하는 내용이다.(공동체의 형벌이란 건, 공리주의적인 방식 외의 것으론 사실 정당화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정당화하지 않는 길을 택하겠다. 형벌은 다수가 그들을 위해서 합의하지 않은 소수에게 힘을 행사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떨까? 그런 경우에도 부모나 스승은 자식과 제자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충고를 해줄 수 있다. 그러나 바람직한 방향이란 대체 뭘까? 자식이나 제자가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태라면, 의사능력이 있는 상태라면, 원칙적으로 부모나 스승은 그들과 정신적으로 대등한 관계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이 은연중에라도 그들의 위치를 이용해 그들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책임이 있다.


  내가 이삭에게 충고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난 아버지를 거역하고 달아나라고 충고하겠다. 에리히 프롬은 불복종을 통해 인간 사회가 역동적으로 발전해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 명령한 것은 신이므로, 이삭이 도망쳐봤자 신앙심 부족이라며 재앙만 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당신이 납치당했다고 하자. 그리고 납치자는 당신을 방에 가둬둔 채 채찍으로 때리면서 "난 널 사랑해서 이러는 거야. 자, 날 사랑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럼 넌 행복할 수 있어. 다 널 위한 거라니까."라고 한다고 하자. 당신은 분명 그를 사디스트에 미치광이라고 여길 것이다.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자식이나 제자를 두들겨 패면서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은 이런 것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정도의 문제는 있다;)

 아무리 때리는 사람이 "내 가슴에 피멍이 들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가 가해자란 점은 변함 없다. 그들의 마음고생을 인정한다고 해도 말이다. 범죄자가 아무리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해도 그를 무죄로 처리하는 일은 없다.


  사회 분위기상 체벌이 가능한 징계란 점은 인정하겠다. (사실은 인정하기 싫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사회 분위기상"이라는 단서로, 기실 체벌은 금지되어야 하고 폐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읽는 분들 중에 체벌을 당연시하는 분들을 위해 단서를 단다.)

그러나 체벌로 자신들의, 기성 세대들의 가치관, 혹은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겠다. 체벌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은.

 사회와 인류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치를 제외한다면,(결국 교육이란 인간 사회가 구성원을 생산해내는 일이므로.)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사실 올바른 교육자의 자세가 아닐까 한다. 자유로운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를 표방하고 있으니 만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