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너그러움에 대한 소망

공현 2009. 1. 14.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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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는 '너그러움이 없는 것'이랍니다.

뭐 그건 제가 상대주의적인 면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운동을 하는 와중에도 종종 짜증이 나는 순간 중 많은 것들이 '너그러움이 없는' 사람들과 부딪칠 때이지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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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러움'이 뭐냐고 하면- 글쎄요, 여유랄까요 아니면 여백이랄까요. 여백이랑은 좀 다른, 어쩌면 그라데이션에 가까운 느낌이긴 한데.
세상을 울타리와 벽으로 구획짓는 게 아니라 좀 더 두루뭉실하게 이해하는 방식?
자신을 긍정하기 때문에 자기 확신을 버리게 된 것?
어쩔 때는 오만함으로 보일 수도 있는- 타자에 대한 인정이랄까 방치랄까- 타자가 나와 동(일)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어느 정도의 '품'으로 부분적 접촉을 인정하는 것? (사실 모든 만남과 관계는 부분적이죠. 좀 더 총체적인 양상을 띨 수는 있더라도.)

소위 말하는 '똘레랑스'랑은 약간 다르다고 생각하지만요, 기본적인 감정-심리 구조는 그것과 비슷할 수도 있겠네요. 어느 정도의 자기 긍정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선 말이죠.
'너그러움'의 문제를 자존감이랑 연결시켜서 풀어볼 수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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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런 거군, 하면서 한숨을 쉬고 넘어갈 수는 없는 걸까요. 아 물론 잊어버리진 말구요.

상대방이 이미 어느 정도 보여버릴 때, 굳이 따져묻고 예상했던 답을 끌어내고 그것을 공박해서 동화시키려 하고- 이런 과정들은 왠지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한답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상대방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제 입장에 대해 생각할 계기가 될 수 있는 질문이나 의견들을 던져두는 것에 만족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어요.
그리고, 상대방이 '이런 상대'라는 걸 염두에 두면서 만나는 거죠. 저의 필요에 따라. 상대의 필요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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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과 옳은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요.
우리가 옳다는 믿음, 그런 게 없다면 어떻게 운동을 하겠냐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더라구요.

하지만 전 솔직히 별로 그런 믿음이 없는 편인데- 어떻게 이렇게 운동을 열심히 하는 건지 (笑)

저의 존재, 저의 감정, 저의 욕망, 저의 마음.
그런 것들에 따라 움직일 뿐이지 저의 생각이나 입장이 보편적으로 옳다고는 믿지 않아요.
대외적으로는 "그런 척"하는 경우야 많죠. 제 생각이나 입장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할 것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으니까.

어떻게 보면 자신감이 없는 거인데, 역으로 자신감이 지나친 걸 수도 있겠군요.
'보편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 '내가 욕망하는 것'인데도 이렇게 타인과 부딪치고 사회 변화를 요구할 수 있다니, 어쩌면 오만함이라고 불러도 할 말 없는 이기주의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너그럽고, 인내심 있는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럴 수도 있지, 라는 건 그냥 귀차니즘과 무감각의 발로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타자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 때문에, 혹은 자기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취하는 태도일 수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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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세상이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나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더 좋은 것과 덜 좋은 것, 더 나쁜 것과 덜 나쁜 것'이거나
'더 바람직한 것과 덜 바람직한 것' 뭐 기타 등등 그런 식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공리주의나 쾌락주의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언제나 타협이죠.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것조차도, 타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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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간혹 "당위"를 삶에 강요하지 말라고 하는 건 그런 때문이죠.
이영도식으로 말하면, 삶의 수단인 윤리를 그 목적으로 만들어버리고 목적인 삶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짓, 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테지요.

저는 삶을 긍정해요. (삶의 일부인 죽음까지도. 물론 아직은 심리적으로 온전히 그런 상태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진부한 휴머니즘적인 표현으로 대체한다면, 약간만 더 삶에 너그러워지자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당위는, 많은 경우에 가언명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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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는 언제나 너그럽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저도 종종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면, 아니면 때론 정치적 필요에 의해 세상과 사람을 선 긋지요.
하지만 스스로 너그럽지 못한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너그럽지 못한 것이 정의를 추구하는 자신의 올바른 태도이고 신념의 수호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아, 너그럽다는 건 단순히 '단정적으로 말하지 맙시다' 같은 건 아니랍니다.
말하는 태도도 무관한 건 아니지만, 딱 그건 아니에요.
사실 전 단정적으로 말하는 걸 좋아하는걸요 @_@ (주댕이나 따이루라면 대충 내가 알아듣지도 못할 알쏭달쏭한 말을 단정적으로 말하는 걸 많이 겪어봐서 알 텐데-)
제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그만큼 그 말에 모호함과 폭을 두기 때문에 그 말 자체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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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싫어하는 사람이야 많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없어요.
뉴라이트건 이명박이건 노무현이건 별로 미워하지 않아요.
누굴 미워해야 할지, 누구를 탓할 수 있을지, 그런 걸 알 수 없으면서도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누군가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세계를 사유하면서도 세계 속에 사는 저의 어쩔 수 없는 이중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 지배적인 감정은 슬픔이죠. 국지적으로는 분노가 나타나는 경우도 많지만. 가끔은 그 분노들조차 슬픔 위에 서있거나 슬픔에 포위당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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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분들이 좀 더 너그러워지길 소망하면서.



p.s. 1  이건 절대로 '늙은이'의 닳고 닳은 처세관 뭐 그런 건 아니랍니다. 저는 나이가 더 적을 때도 다분히 이랬으니까요. "그때부터 애늙은이였겠지"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p.s. 2  '절대적인 선'(윤리, 연민 등)을 공적 영역(정치)에서 실현하려는 시도는 파국을 낳는다고 역사적 실례들을 분석하며 말한 한나 아렌트 씨가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