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2007년 저소득빈곤 아동의 건강권 토론회 때 토론문

공현 2009. 1. 14. 14:30


2007년에 지역아동센터협의회에서 연 토론회에서 썼던 토론문-
이래저래 난감했던 토론자리였던 듯.

후일담으로, 토론비로 7만5천원을 입금해야 하는데 담당자가 실수로 75만원을 입금해서 내가 (한참 고민하다가) 나중에 돈을 돌려줬었다;;;

옛날 글인데 문득 이사할 때 안 챙겨온 게 생각나서 올려둔다-



‘연대’를 통한 건강권 실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윤종

◎ 건강권, 그 조심스러워야 하는 영역

  이른바 “아이들의 건강권”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할 때면 조심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의식주를 비롯하여 의료, 문화 등과 연관되어 있는 생존권이나 건강권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인권 영역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동’의 영역으로 올 때는, 특별히 조심스러운 태도가 요구된다. ‘아동인권’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인권의 개념은 자유권에서 사회권으로 확대되어 왔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동인권’의 경우에는 사회권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그 이후에야 자유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정반대의 역사를 갖고 있다. “미성숙”하다고 폄하되는 아동의 자유와 참여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보다, 아동에게 물질적 원조를 제공하고 아동을 이른바 유해환경으로부터 통제하는 방식이 비아동들에게는 덜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아이들의 건강권”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먼저 그 방식이 아이들을 타자화하고 시혜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또한, 그것이 일부 비아동들의 입장에서 “널 위한 거다”라며 선(善)을 독점하고 강요하며 아이들을 통제하는 방식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덧붙여서, 흡연․음주 규제를 비롯해서 종종 눈에 띄는  ‘아동’에 대한 통제를 주로 하는 기존의 ‘보호․선도’ 방식에 대한 문제의식도 필요하다. 생산자인 기업(자본)과 국가, 사회 구조에 대해 태클을 걸기보다는 소비하는 아이들을 통제함으로써 아이들을 이른바 ‘유해환경’들로부터 ‘보호’하려는 방식에는, 사회적 권력이 약한 쪽을 억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올바르지 못한 면도 있다.

  인권의 불가분성이라는 말은 단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다. (제3세대 인권이라는 연대권은 차치하고라도) 사회권 없는 자유권, 자유권 없는 사회권은 허상이거나 일종의 폭력이 될 우려가 있다. 아이들의 의견과 참여, 자유가 존중되지 않는 건강권의 추구는 일방적인 시혜나 통제가 되기 쉬운 측면이 있으며, 때로는 오히려 반인권적인 성격을 띠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용중 씨의 발제 중에서 게임 산업체의 의견이 과도하게 반영되는 문제, 음식물의 생산 구조, 양극화, 경쟁적 사회 구조, 근대 과학기술과 자본주의에서 광범위하게 비롯되는 생태계 파괴와 파괴적인 생활 환경 등을 지적하는 부분은 중요하다. 농촌과의 연계나 광범위한 음식물 생산․유통․소비 구조의 변화, 경쟁중심의 양육문화의 변화 등의 정책적 대안들도 비중있게 다뤄야 하는 주장이라고 하겠다.



◎ 차별적이지 않으며 인권적인 건강권을 요청한다

  기본 주제에서는 벗어나는 듯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용중 씨와 이향란 씨의 발제 초안(내가 이 토론문을 쓰고 있는 지금 받아서 보고 있는 것은 최종본이 아니라 초안이니까) 중에 보이는 차별적인 내용들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글 전체를 훑으며 문구 하나하나에까지 매달리자면 2~3페이지 안에 이 글을 다 쓰겠다는 내 결심을 지킬 수 없게 될 테니, 몇 가지만 언급하겠다.

  예컨대 이용중 씨는 발제 중에 “트랜스젠다 증가”와 “동성애자 증가”를 사회적 문제로 보고 있으며 이향란 씨도 성교육을 제시하는 부분에서 “정상적인 것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며 비정상적인(동성애․노출 등) 것에 대하여는 질문이 없는 한 소개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있다.

  모두가 이성애와 남성/여성의 분리법만을 ‘정상’으로 규정하고 그 외의 동성애, 트랜스젠더, IS(Inter Sexual) 등을 ‘사회 문제’나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소수자를 심각하게 차별하는 내용이 ‘정상’을 기준으로 한 건강권을 명목으로 교육되거나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 등에 대해서는 충분한 인권교육/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며, 다른 교육 속에서도 이에 대한 차별적 언급이나 비가시화가 없도록 해야 한다. (이성교제, 이성친구를 비롯해서 이성애만이 당연한 것처럼 묘사하는 여러 가지 표현과 뉘앙스들. 남성과 여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남성/여성으로의 성별분리만이 유일한 것인 양 말하는 것 등.)

  이런 차별적인 인식에 대한 경계심은 장애인에 대한 언급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며, 건강교육을 할 때도 장애인이 배제되지 않도록 ― 가능하다면 장애인․비장애인 아이들이 함께 이야기하여 장애인이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활동이나 놀이를 고민하도록 하는 통합교육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건강의 기준’을 일방적으로 설정하고 비장애는 건강한 것이고 장애는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하거나 해서도 안 되며, ‘표준’이나 ‘평균’이라는 명목으로 거기에서 벗어나는 집단에 대한 차별을 낳게 되는 교육도 내용을 수정해야 한다.


  또한 건강권을 ‘국가경쟁력’이나 ‘국가발전’, ‘노동력 상실’ 등의 관점으로 접근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러한 논리는 인간을 수단화하고 차별을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 예를 들어 불임 문제는 저출산을 야기하는 문제로서가 아니라 아이를 낳고 싶으나 불임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의 행복과 권리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저출산은 생태적으로는 오히려 바람직한 것일 수도 있다.) 성소수자나 장애인에 대한 차별에는 분명 ‘국가경쟁력’ 등의 논리가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단체생활에서는 질서를 지키자”(성교육 부분에 들어가 있어서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알쏭달쏭한데) 같은 경우도, 단체생활에서의 질서나 규칙 자체를 강조하기보다는 그 질서나 규칙이 민주적으로 만들어졌고 또 그 내용이 합리적이고 인권적인지, ‘나 자신’이 거기에 동의하고 있는지를 고민하게 했으면 한다. 질서나 규칙 자체가 인간이 만든 것이고 자신과 친구들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임을 체득하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중요한 건, 권리의 문제를 권리 주체와 그 권리 주체의 사회적인 관계들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당사자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리 주체를 수단화시키고 수동적인 존재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이미 권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통제해야 할 자원이나 (‘누구’가 아닌) ‘무엇’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 버릴 것이다.



◎ ‘연대’를 통한 건강권 실현을 위해

  이 자리가 국가정책을 이야기하는 자리인지 지역아동센터의 건강권에 관한 교육이나 사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인지는 헷갈리지만, 여하간 다소 모호한 위치에서 건강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나는 지역아동센터나 공부방에서 활동해본 적도 없고 정부에서 정책을 만들어본 적도 없으니 이에 대해 디테일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 여기며, 뭐 이 글 전체가 그렇듯이 좀 대략적인 관점과 원칙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어쨌건 이 토론회에 참석하는 사람 중에 지역아동센터의 아동은 없을 거라는 가정을 별다른 근거없이 내리고 쓰는 것이니, 혹시 토론회에 오신 분 중에 지역아동센터의 아동 당사자 분이 있다면 이후의 제안 내용이 아동 입장에 대한 것이 아닌 점을 사과드린다.

  아동, 비아동 할 것 없이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건강권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광범위한 생태계 오염과 파괴,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합성물질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저소득층 빈곤 아동은 건강에 좋지도 생태적이지도 않은 음식이나 주거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 해결을 위해서 정부의 복지 예산 증가와 그 수급 과정이나 방식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 또 그 무엇보다도 이용중 씨가 제안한 것과 같은 전반적인 사회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소비자에게 쓰지 말자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불매를 비롯해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생산자 및 생산․유통구조에 직접 태클을 걸어야 한다.

  문제는, 아이들을 어떤 위치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에 관해서다. 빈곤층 아이들은 단지 지역아동센터의 교사가 배려해줘야 하는 특별한 소수자인가? 빈곤층 아이들의 건강권은 지역아동센터를 비롯해서 비아동들 쪽에서 일방적으로 노력하고 베풀어줘야 할 문제인가?

  내가 거듭 아동들의 참여나 아동들에 대한 존중 등을 강조하게 되는데, 빈곤층 아동들의 영양이나 건강권 문제는 심각하지만 동시에 빈곤층 아동들의 자존감, 자립심의 문제도 중요할뿐더러 이러한 면이 결여된 채로는 결코 이를 온전한 권리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내 제안은 아동들을 연대의 주체로 인정하고 활동이나 교육도 그런 맥락에서 접근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아동들에게 단지 유해한 것을 최대한 피하는 법이나 식습관 같은 것만을 가르치지 않았으면 한다.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하려고 노력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아동들을 존중해야 한다. 아동들도 변화의 주체이다.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비아동들만 알고 있고 아동들은 단지 그 문제에서 나타나는 현상들로부터 벗어나게 잘 해주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동들과 함께해나가는 방식을 생각해야 한다.

  예컨대 담배가 몸에 해롭다고 가르친다면, 그럼 그런 담배를 왜 국가에서 만들어서 파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줘야 할 것이며 또 ‘성년’은 담배를 펴도 되고 ‘미성년’은 담배를 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는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법률에 대해서도 함께 토론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는 성폭력, 식생활, 주거의 문제 등에 모두 해당한다. 사회적 문제나 구조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이를 어떻게 하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새롭게 만드는 것 또한 교육일 것이다.


  아동들이 함께 자신의 건강권을 실현해가고 때로는 얻어나가도록 하지 못한다면, 이는 궁극적으로는 비아동들의 시혜적인 대책에 머물 수도 있다. 물론 비아동들도 건강권의 위협을 받고 있는 건 마찬가지이니, 비아동들이 나서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 동들보다 높은 곳에 서서 아동들을 배려하고 뭘 자꾸 베풀어주려고 하기보다는, 아동들과 함께 ‘연대’하는 교육과 활동을 실현했으면 한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런 연대를 통해서만이 아동들의 건강권에 필요한 실천들, 제도들, 사회적 관계들, 생산 방식들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