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청소년의 두 가지 ‘빈곤’

공현 2009. 2. 28. 02:06
아수나로 북에 실으려고 쓴 글...

쿨럭.




청소년의 두 가지 ‘빈곤’

 1
  자, 당신이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어느 가난한 청소년이라고 상상해보자. 아마도 당신의 집은 어느 허름하고 오래된 주공아파트이거나, 반지하나 지하층일 것이다. 집에 습기가 차거나 책꽂이 뒤편에 곰팡이가 피어 있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닐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상쾌하기보다는 퀘퀘한 냄새에 몸이 찌뿌둥한 집.… 아니면 ‘달동네’라고 불리는 그런 곳, “가파른 계단길이 보이고 집집마다 벽이 거의 맞대어 있는 듯하였다. 연희의 엄마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연희는 공사장에서 벽돌로 소꿉놀이를 한다.…”(소설 비누인형 중에서) 이런 서술이 낯설지 않은 곳에 살고 있을 수도 있다.
  학교에서 당신은, 담임 교사가 당신이 기초생활수급자인지 급식비 면제인지 어떤지 학생들 모두가 있는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기를 바래야 한다. 비록 수업료나 학교운영지원비는 면제라고 해도 준비물 값이라거나 교재 값 등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기에, 제대로 수업을 받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당신의 가정이 어중간하게 돈을 벌어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지는 못하지만 가난하다면(이른바 차상위계층. 기초생활수급자보다는 돈을 조금 벌지만 여전히 살기는 초 어려운 사람들) 더욱 곤란한 노릇이다. 게다가 당신이 성적이 좋을 가능성은 별로 많지가 않아서, 성적에 따른 차별과 경쟁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학교에서 당신은 듣보잡 취급을 받을 것이며, 친구들이 학원을 다니거나 보충수업을 받는 것이 부러워 보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열등감이나 낮은 자존감 등을 보상받기 위해 폭력으로 남을 괴롭히거나 돈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더해 다른 학생들의 삥을 뜯는 그런 청소년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은 집에 가도 그리 즐겁지는 않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가족들이 모두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탓에 당신은 필요한 최소한의 관심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다면 가난 때문에 자포자기한 심정이 된 어른들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거나, 방임되어 있을 것이다.(‘소년소녀가장’이나 ‘조손가정’도 많을 것이다.) 지역 공부방이나 지역아동센터에 나가는 것은 먹을 걸 주기도 하고 집안 일을 걱정해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걸 도와주기 때문에 당신이 조금 좋아하는 일 중 하나다. 하지만 공부방 선생님들도 항상 일손과 돈이 부족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많은 관심을 계속 주긴 어렵다. 안 좋은 주거환경과 식생활, 그리고 주변에서 관심을 많이 못 주는 탓에, 당신은 가벼운 병에 걸려도 영양 상태가 안 좋거나 제때 치료받지 못해서 큰 병으로 발전할 위험이 그나마 조금 사는 청소년들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2
  또 다른 상상을 해보자. 당신은 빈곤층이라고 할 만한 집은 아니고, 부모가 어느 정도 먹고 살 수 있는 정규직 노동자인 청소년이다. 당신은 비록 아주 비싼 것이나 호화스러운 물건을 맘대로 지르거나 ‘꽃보다 남자’의 F4처럼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진 못했지만, 이때까지 넉넉한 용돈을 받으며 적당히 풍족하게 살아왔다. 수업료나 학원비 같은 건 모두 부모님들이 계좌이체로 처리할 문제였고 당신은 별로 신경쓰지 않아서 그 금액이 얼마인지도 잘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중학교 2학년 즈음에 부모와 진로 문제로 크게 다투고 가출을 했다고 하자. 당신은 가출을 해서 가정의 테두리 밖으로 나오자마자 돈이라는 게 얼마나 잔인한 현실인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잠은 어찌어찌 친구 집을 전전하며 해결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교통비, 식비, 옷값 등등 사는 게 쉽지가 않을 것이다.
  집에는 들어가기 싫고, 처음 나올 때 챙겨 나온 돈도 곧 떨어질 텐데, 알바를 해보려고 해도 부모 동의서가 필요할뿐더러 당신은 아직 나이가 되지 않았다. 당신이 만일 여성 청소년이라면 돈을 벌거나 잘 곳을 얻기 위해 성매매를 할지도 모른다. 혹시, 정말 만에 하나, 복권에 당첨되어서 독립해서 살 수 있는 집을 얻을 만큼의 목돈이 생겼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그렇더라도 당신은 ‘민사상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보호자 없이는 당첨금을 받기도 어렵고, 그 돈으로 집(전세든 월세든) 계약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가난’이라는 인권침해

  “가난”(家難)이란 말을 한자 그대로 풀이해보면, 집(家)이 어렵다(難)는 뜻이다. 이 단어 속에 경제적으로 부유한지 빈곤한지를 판단하는 단위가 “집”(가족, 가정)이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청소년의 경우에도, 그 청소년의 경제적 지위 ― “계층”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계급”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 는 그 청소년이 속한 가족/가정의 경제적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그 친권자(부모나 후견인, 때로는 공공시설. 보호자.)가 돈을 얼마나 벌고 돈을 얼마나 갖고 있냐에 따라 청소년의 경제적 지위도 정해진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빙빙 돌려 말했지만, 요컨대 소득이 적고 재산도 적은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가족의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면 청소년들도 빈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지금 내가 “빈곤”, “가난”, 말은 참 쉽게 하고 있지만, 빈곤이란 건 쉽지 않은 문제다. 빈곤이라는 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꼭 필요한 이런저런 것들을 제대로 얻을 수 없는 조건이라는 소리다. 소유하고 소비하는 물질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평가되는 사회에서 빈곤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가 낮다는 의미도 된다. 가난은 우선 주거·식사·건강 등 물질적인 면에서 청소년들의 인권을 위협하고, 장기적으로는 청소년들의 자존감이나 성격 등에도 악영향을 끼치기 쉽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2008년 7월 5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요구하고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촛불행진에 참가했던 한 청소년이 집에 돌아와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청소년이 자살한 직접적인 이유는 그렇게 명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 청소년의 집은 기초생활수급 가정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으며, 그 청소년의 담임 교사는 기초생활수급자 명단을 다른 학생들 앞에서 대놓고 읽어가며 공개했고, 부유한 집안과 가난한 집안을 차별하는 말도 종종 했다는 일 등이 알려졌다. 이런 것들이 그 청소년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아무 영향도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공교육은 다분히 ‘계급적’이다. 이건 이제 너무 노골적이어서 비밀도 폭로도 아니다. 부자 동네로 유명한 서울 강남지역이 입시경쟁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고, 입시경쟁에서 성과를 거두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부유하거나 안정적인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자란 청소년들이다. 주거환경, 사교육, 부모나 가족들의 직업과 학력수준, 성장환경에서 익히게 되는 언어나 문화의 차이 등 여러 가지 요인을 들 수 있겠지만 어쨌건 이미 공정한 경쟁이니 기회의 평등이니 하는 환상들은 깨진 지 오래다. 무상교육이나 복지제도도 제대로 되어 있지는 않고, 하물며 사교육이나 보충수업 등의 개인적 교육비 투자를 ‘선택이 아닌 필수’로 여기게 만드는 입시경쟁 하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가난한 청소년들이 힘겹게 교육받더라도 쾌활하고 즐겁게, 순수하게 학교생활을 한다는 것도 낡은 환상이다. 물론 어딘가에 그런 청소년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러 가지 차별이나 열등감, 학벌사회 등은 저소득층 청소년들 중 다수가 입시경쟁에서 탈락하거나 아니면 아예 학교를 때려치우고 알바를 전전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교사들 중 대부분이 빡센 입시경쟁이나 임용고시 경쟁을 통과한 엘리트이고 빈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가난한 청소년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주의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가난한 청소년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학교교육도 문제지만,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더 큰 문제는 주거환경이나 가정환경일지도 모른다. 열악한 주거환경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도 문제고, 돈 벌어 먹고 사느라 바빠서, 아니면 아예 신경써줄 다른 가족이 없어서 인간으로서 또는 청소년으로서 필요한 지원이나 관심을 제때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한 경우에는 어른들의 폭력이나 학대를 당하기도 하고, 그렇게 몸에 각인된 폭력성과 상처들은 그 청소년들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 지역공부방, 지역아동센터, 복지관 등에서 이런 청소년들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역부족이다.
  가난한 청소년들의 인권을 보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역 공부방과 지역아동센터, 복지관 등에 지원을 늘리고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시켜서 지역적으로 가난한 청소년들을 지원하고 돌보며 시스템을 만드는 일도 하나의 과제가 될 수 있겠다. 가난한 청소년들의 심리적인 면을 돌보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좀 더 현실적인 생계 보장과 실질적인 지원이 가능한 복지 정책이 필요하다는 정도 이외에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결국 심각한 빈부격차/양극화와 계급을 없앤다거나, 입시경쟁을 없앤다거나,(“가난한 청소년들도 입시경쟁에 공정하게 참여할 수 있게 하자.” 라는 말은 좀 뭔가 이상한 소리라고 생각한다.) 하는 다분히 근본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빈곤은, 이 자본주의 사회 최대의 문제 중 하나니까.


‘청소년’ 자체의 계급성

  앞서, ‘가난한’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욱 늘어놓았지만 이번에는 ‘청소년’이라는 것 자체가 빈곤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가난”의 뜻을 설명하면서 빈곤을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단위가 가정/가족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경제적 상태가 그 가족의 소득이나 재산에 달려 있는 게 보통이라고 하더라도, 한 가족 안에서도 경제적 지위는 다를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페미니즘 사상에서는 사회적 임금에서나 가족 안의 지위에서나 여성이 남성 가부장과는 다른 경제적 지위나 권한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일종의 계급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서,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여성에게는 경제적 권리나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가 많았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어떻게 보면 여성이 일종의 ‘노예’ 신분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청소년들 또한 사회적으로 그리고 가족 안에서 다른 경제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청소년들에게는 ‘경제적 권리’가 얼마나 보장되고 있는가? 여기서 경제적 권리는 단순히 ‘(사유)재산권’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의식주, 문화생활 등)을 보장받고 자유롭게 사회적 생활을 누리기 위해 꼭 필요한 권리를 의미한다. 지금까지 이 사회는 청소년들이 필요한 돈이나 의식주 등을 가정/가족에게서 제공받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아주 ‘가난한’ 경우가 아니면 청소년들의 의식주나 경제적 권리 등은 굳이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가족/가정에 종속된 존재가 아닌 청소년’, ‘친권자(부모 등)의 소유물이 아닌 청소년’ 등을 꿈꾸기 시작하는 순간, 이런 인식은 효력을 잃게 된다.
  우선, 청소년들이 가정/가족의 지원으로 생활을 보장받는 것은 결코 공짜도 아니고 친권자의 일방적인 희생도 아니다. 거기에는 경제적 지배의 성격이 있어서, 많은 경우에 이런 경제적 지원에는 대가가 따른다. 친권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할 것, 열심히 공부할 것, 친권자의 말을 잘 들을 것, 진로 결정시에 친권자의 의견을 중요하게 고려할 것 등등이 대표적이다. 친권자(대개 부모들)가 청소년들에게 가지는 독점적인 영향력 또한 이런 경제적 지배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88만원세대』에서 우석훈, 박권일 씨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런 경제적 종속성이 20대 중반까지도 계속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청소년들의 경제적 권리는 매우 포괄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청소년들은 만20세 미만은 ‘미성년자’라는 민법의 규정에 따라 민사 계약(그러니까, 보통 돈이 오가는 계약.)을 할 권리가 원칙적으로 없다. 계약을 하더라도 보호자/친권자의 동의가 필요하거나, 보호자/친권자가 그 계약을 사후에 취소해버릴 수 있다. 청소년들의 임금 노동(종종 ‘알바’라 불리는)에도 많은 제한이 뒤따른다. 한 마디로 청소년들이 돈을 벌고 쓰기 어려운 사회라는 것이다. 하긴, 법적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되더라도 한국의 경제 상황이나 청소년들에 대한 저임금 착취, 부동산 가격 및 물가 등을 볼 때 그런 식으로 돈을 벌어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겠지만….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청소년들은 모두 (굳이 빈곤 계층의 가정에 속해 있지 않더라도) ‘잠재적인 무산 계급’(재산/생산수단 등이 없는 계급)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가족이 제공하는 보호·통제·지배·지원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순간, 헐벗은 몸뚱아리만 가지고 아무런 경제적 권리도 없이 살아남기 힘든 존재가 될 테니까 말이다. 물론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청소년이 쉽게 그걸 포기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이런 인식에 다소의 무리가 따를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청소년들에 대한 친권자/부모의 지배, 사회적인 통제 등을 말할 때는 청소년들의 경제적 권리 문제, 또는 계급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청소년들의 경제적 권리를 요구한다고 하는 것은 단지 청소년들에게 일해서 돈을 벌 기회를 제공하라는 뜻이 아니다.(당장은 그런 의미가 포함되겠지만.) 경제적 권리 중에 노동인권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노동인권이 곧 경제적 권리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청소년 노동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청소년들의 경제적 권리 전반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면, 청소년들이 알바를 하면서 ‘어느 정도 안전한 환경에서 착취당할 권리’를 요구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국가나 사회가 개인의 최저 생계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국가나 사회가 청소년들의 독립적인 생활을 보장하고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생활하지 않더라도 의식주와 생활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하라는 이야기다. 모든 청소년이 7살 때부터 강제적으로 독립적 생활을 하게 하라는 건 아니지만, 청소년들이 원한다면 독립적 생활도 가능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청소년의 경제적 권리가 실현된다는 것은, 가족/가정이라는 사회적 기반과 ‘미성년자’에 대한 사회적 통제에 타격을 가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매우 ‘불온한’ 요구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급진적인’ 요구이다. 그러나 인권은 이 사회의 테두리와 한계를 넘어 다른 사회를 상상하는 능력을 잃는 순간 살아 숨 쉬는 언어가 될 수 없다. 청소년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이 사회의 근본적인 밑그림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이 그렇게 못 할 짓인가? 나는 아무리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루어내야 할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