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

최시한,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중에서 - 모두 자기 촛불을 꺼 그러면 아무도 패배하지 않아

공현 2009. 3. 19. 23:36


오답 승리의 희망 창간호에 이 소설 소개 글을 쓴 기억이 난다.
그때 처음에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를 실을까 하다가 너무 빡세지 않냐, 첫 호는 좀 유하게 소설로 가자, 라고 해서 썼는데
정작 써놓고 보니 이 소설이 더 빡센 것도 같았다. 전교조 창립 당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전교조의 관점이라기보다는 학생의 관점에서, 그리고 입시경쟁 문제 등에 좀 더 비중을 둔 소설...

처음에 접한 건 논술 연습을 할 때 제시문으로였는데, 우리들에게 이런 얼토당토 않은 경쟁을 요구하면서, 그 교육제도에 대해 논술을 해보라고 하는 가증스러움에 치가 떨려서 붉은 펜으로 한 문단 써놓고 집으로 훌쩍 와버렸었다. 그래서 사회 선생님이랑 좀 많이 싸웠지.
이 부분이 바로 그때 제시문에 있던 부분 중 일부이다.




일제고사 반대 오답 선언을 모으는 일이, 말하자면 결국 그런, 모두 자기 촛불을 끕시다, 이런 이야기인 것 같아서 문득, 옮겨둔다.

모두 자기 촛불을 끄자... 모두 오답을 찍자... 모두 경쟁을 거부하자...
참 간단해보이는 옳은 해법이지만, 신뢰가 없이는 어려운 일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한 명이라도 더 촛불을 끄는 사람을 늘리러 다니는 게 내가, 우리가 할 일이다.

 

 




11월 30일
  오늘 생물 시간에 선생님이 적자생존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깨알 같은 글시로 칠판을 한참 메워나가고 있을 때였다. 워낙 공책 검사를 철저히 하는 터라 설명도 듣는 둥 마는 둥 옮겨 적고 있는데 윤수의 목소리가 났다. 나는 정신이 번쩍들었다. 윤수가 심하게 더듬거리는 말로 무어라 질문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도 잘 알아듣지 못했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으셨다.
  "적자생존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구? 질문을 하겠으면 사내답게 똑바로 해."
  교실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윤수가 질문이라곤 해본 적이 없어서 나부터도 윤수가 질문 같은 걸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탓이다. 게다가 윤수의 질문은 까다롭기로 소문난 생물 선생님의 수업을 느닷없이 중간에서 끊어버린 셈이었다. 윤수의 두 손이 쉴새없이 교복 앞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화, 환경에 맞지 아, 않는 건 모두 죽어, 죽어야 합니까?"
  "죽는다기보다 도태되는거지. 환경에 맞는 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도태되기 마련이라 그 말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환경에 잘 맞았거나 맞게 변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들이지. 됐어?"
  "벼, 변하면 --- 어떠, 어떻게 변합니까?"
  선생님은 또 얼굴을 찌푸렸다. 윤수의 입에서 무슨 엉뚱한 소리라도 나오면 어쩌나싶어 조마조마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 설명을 다 했잖아. 자 자, 그럼 이번에는 숲을 예로 들어보자구. 참나무나 소나무 같은 것하고는 달리 음지에서만 사는 식물이 있지? 위로 자라지 못해 햇빛을 받을 수 없으니까 음지에 맞게 변화되고, 그렇게 적응한 놈만 살아남은 거야. 자연의 조화지."
  "음지, 음지에 사는 게 져, 졌는데 그게 어째 자, 자연의 조화입니까?"
  "지다니? 이런 참, 지고 이기고가 아니야. 좋고 나쁜 것도 아니고! 생물의 법칙이 그렇다는 거지. 적자생존, 자연선택설, 그것만 기억하면 돼. 돌연변이도 설명할 참이니까 이젠 자리에 앉아."
  그러나 윤수는 앉지 않았다. 계속 교복 앞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더듬대다가 가까스로 말을 만들어냈다.
  "그, 그럼, 사람, 사람은 평등한데, 환경에 따, 따라 --- 그게 저, 적자생존인지, 조, 조화인지 --- "
  "왜 쓸데없이 복잡하게 생각을 하고 그래? 진도 방해 그만하고 그냥 외워!"
  윤수가 비로소 자리에 앉았다. 나는 소리 죽여 한숨을 토했다.
 

(....)


12월 7일
  기원의 밤은 교장 선생님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밖은 이미 캄캄했다. 강당 안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3학년 남녀 학생들이 가운데 앉고 학부형들이 그 주위에 앉거나 서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해마다 전국의 우수 대학에 많은 합격생을 배출해온 명문 학교의 빛나는 실적을 강조했다. 다음에는 어떤 3학년생의 어머니가 학부형 대표로 나와서 그 동안 정말 고생했다는 말을 거듭했다. 잠을 못 자서 코피 쏟던 얘기, 압박감 때문에 소화불량에 걸려 고생하던 얘기 등등을 놓고 구슬픈 목소리로 이어나가자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무대 아래쪽에 불이 꺼졌다. 부분 조명 속에서 교장 선생님이 초에 불을 붙였다. 3학년 담임선생님들이 초를 한 자루씩 들고 나와 그 촛불에 불을 붙였다.
  담임선생님들은 가만가만 무대에서 내려와 자기 반 앞에 섰다. 두 손으로 초를 받쳐 든 학생들이 한 명씩 나와서 다시 그 촛불에 불을 붙였다. 강당 안은 점점이 불어나는 촛불로 채워져갔다.
 [중략]
  피아노 소리가 정적을 깼다. '선구자'였다. 한복을 차려입은 임춘미가 사뿐히 걸어 나와 노래를 불렀다. 학생들이 처음에는 낮게 나중에는 춘미의 목소리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게 따라 불렀다. 독립군들처럼 비장하게, 그만하면 모든 게 된 셈이었다.
 [중략]
  노래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고 내가 막 일어서려는 그때, 춘미가 물러나는 자리에 누가 불쑥 나타났다. 그의 목소리가 확성기로 울려나왔다.
  "우, 우, 우리는 마, 마라톤 선수, 선수가 아닙니다."
  바바리코트를 입은 윤수였다.
  "모, 모두 승리, 승리하면 누가, 패, 패배합니까?"
  순간 실내에는 터질 듯한 정적이 흘렀다. 경규가 튀어나와 윤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 몸이 부들부들 떨었다.
  선생님들, 또 앞자리의 3학년 남학생들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윤수가 마이크를 움켜쥐고 외쳤다.
  "자기, 자기, 초, 촛불을 꺼! 꺼! 그러면 아, 아무도 패배하지 않 --- "
  아아 나는 또다시 어쩔 수 없었다.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3학년들이 무더기로 달겨들어 윤수를 무대 아래로 끌어내렸다. 문밖으로 질질 끌고 갔다. 놀랍게도 그들은 뜯어말리는 선생님들까지 거칠게 밀쳐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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