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2009 관악 페미니즘 문화제 후기 -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공현 2009. 4. 7. 17:25

--- 사실은 이거, '페미니즘의 이해' 수업에서 과제가 여성학 주간 행사 참여하고 감상문 써내는 거라길래 쓰던 거였다.
근데 열심히 쓰다가 다시 안내를 보니까 그냥 여성학 주간 행사가 아니라 "여성학 주간 학술행사"로 되어 있다. 쿠궁!!
난 학술 행사는 하나도 참가 안했다 -_-;;;;;;
그래서 허탈해져서 그냥 과제로 내는 건 포기하고 원래 계획보다 줄여서 2페이지 정도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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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거의 학교 안에 적을 두고 있지 않다고 해야 할 정도로 대학생으로서는 불성실한 내가 오래간만에 학교에서 뭔가를 해볼 일이 생겼다. 3월 30일부터 시작하는 여성학 주간. 서울대학교 여성학 협동과정 10주년 행사라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여성학 협동과정 그 자체의 역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서울대 안의 여성학이랄까 여성주의랄까 그런 것의 흐름이나 현재에는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2월 무렵 관악여성주의자모임(관악여모)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아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페미니즘 문화제>, <페미니스트 박람회> 준비까지 같이 하게 되었다. 내가 관악여모를 같이 하자고 제안을 받아서 하겠다고 한 건지, 페미니즘 문화제 사업을 같이 하자고 제안을 받아서 하겠다고 한 건지, 뭔가 헷갈렸지만 그냥 둘 다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무방할 듯했다.
  하지만 정작 3월 10일로 되어 있던 일제고사가 3월 31일로 미뤄지면서 본업인 청소년인권운동이 3월 31일까지 바빠져 버렸고, 페미니즘 문화제 준비 등은 계속 시간을 쪼개가며 같이 할 수 있었지만, 여성학 주간에는 충분히 참여하지 못했다. 3월 31일에 일제고사가 끝나고 그 여파로 거의 이틀간 부족한 잠을 보충해버렸기 때문에, <페미니스트 박람회> 컨셉으로 진행된 전시와 페미니즘 문화제 자체만 참여하고 그 외의 시간은 잠을 자거나 준비 중인 출판 작업에만 매달리게 됐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결국 여성학 주간 행사 중에서 참여한 건 <페미니스트 박람회>와 <페미니즘 문화제>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여기에 쓸 만한 이야기도 일단은 그것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다.

  한 2년 정도 단절되었던 페미니즘 문화제를 다시 살려보자, 페미니스트 언니들이 아직 이 캠퍼스 안에 있다는 걸 알려보자, 정작 눈에 띄는 페미니스트는 없이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야기들만 무성한데, 그 이야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페미니스트 우리들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페미니스트 박람회>라는 컨셉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은, 준비하는 내내 우리는 우리가 대체 뭘 해야 하는지가 명확하게 잡히지 않아서 허우적거렸던 것 같다. 사회대여성주의연대(사연)에서는 과거에 사연에서 활동했던 페미니스트들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해서 영상을 만든다고 한다. 난리부르스에서는 ‘해피엔딩의 조건’으로 상처를 이야기한다고 한다. 우리는? 서울대 안에 있는 ‘페미니스트들’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또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우리에게는 성폭력 같은 선명해 보이는 주제가 있나? 아니, 그런 주제를 찾으려고 하는 게 맞긴 한 걸까?
  <페미니스트 박람회>와 <페미니즘 문화제>를 준비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었다. 퀴어, 연애, 군가산점, 성폭력, 흡연, 옷차림, 가족, 여성가족부…. 이야기할 게 없는 게 아닌데, 마치 주위를 둘러보니 360도 모두 갈 수 있기 때문에 길이 없다고 표현해야 할 상황 같은 그런 느낌. 조금씩 끌리는 것들은 있지만 확 끌리는 건 없는 상태. 굳이 주제를 “페미니스트” 그 자체로 잡았던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야기들과 사람들에 대해 더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명확한 목표가 있어서 미래를 지향한다기보다는, 현재를 점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공들여 만든 전시물들이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전시되었고,(목요일은 문화제 준비하느라 미처 못했다.) 금요일에는 페미니즘 문화제가 치러졌다. 월요일에는 페미니스트들이 모여서 학교 안을 행진하고, ‘말풍선 터뜨리기’ 뭐 그런 캠페인 겸 퍼포먼스 같은 것도 했고… 좀 아쉬운 건 전시에 대한 사람들의 피드백을 많이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무슨 이야기라도 있나 싶어서 스누라이프 같은 곳에 가서 검색을 해봤지만 관련해서 올라온 글은 한 개도 없다. 좀 ‘파문’을 일으켜보고 싶었는데 별 반응이 없다. 킁. 퍼포먼스와 문화제는 재미있었다. 비록 사람은 20명 좀 넘게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만큼의 사람들이 그래도 서울대 안에 있다는 걸 확인했다는 걸 긍정적으로 평가하련다. 문화제 준비하면서 체감하게 된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자유로운 자치적 활동에 걸려 있는 온갖 규제들은 날 짜증나게 했지만. 다음번에 또 준비한다면 좀 더 풍성하게, 그렇게 하고 싶다. 이번에도 충분히 재밌긴 했지만 아무래도 좀 풍성함이 덜했달까.

  요즘 꽂혀서 듣는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우리 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걸어온 거야. 언제나 길의 끝에 서있던 사람들이 우리가 온 길을 만들어온 것처럼. ……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이제는 우리가 빛이 될 차례야. 그렇게 왔잖아, 우리 당당하게. 이제 진짜 우리의 시간이 온 거야.”  (지민경, 「길 그 끝에 서서」 中)
  이번 <페미니즘 문화제>와 <페미니스트 박람회>를 하면서 든 생각이 딱 이런 거였다. 더 이상 대학교 안의 여성주의 단위로서 무슨 활동을 해야 할지 뚜렷하게 보이는 게 없는 건 우리가 길 끝에 서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다. 그리고 이번에 해본 <페미니즘 문화제>와 <페미니스트 박람회>는 그 길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서있는 지금 여기를 살펴본 자리였다.

추신 : 처음에는 여성학 주간 행사로 신청해서 준다고 한 100만원 그거 많아보였는데 포스터 좀 뽑고 이젤 좀 사고 해보니까, 절대로 돈이 여유 있는 게 아니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