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2009. 4. 26. 00:01


2005년 4월에 썼던 수필. 딱 4년 정도 됐구나.




가로수 아래, 주검을 내려다보다가

 

 

 ‘죽음이란 언제부터였을까’라고 묻게 되지만, 아마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이었을 것 같다. 시체가 굴러다니는 일이 흔한 것이 세계다. 그 진술은 생명이 존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적용 가능하다.


 현대를 가리켜 불안의 시대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와 비교해 볼 때 현대가 특히 더 불안한 시대인 것은 아니다. 다만 과학기술에 대한 환상이 깨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실망스럽게 느껴지는 것뿐일 터이다. 병사(病死)가 줄어들고 평균 수명이 연장된 대신에 교통사고와 가스 폭발, 전쟁 등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인구가 증가한 것을 보면 객관적인 수치 면에서는 아마 후자가 전자를 대신했다고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러나 주관적인 면에서 봤을 때, 곧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는 정도 면에서는, 결국 후자가 전자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길에 자동차 바퀴에 깔려 죽은 쥐의 시체가 있어도 사람들은 특별히 놀라지 않는다. 그것을 자주 보지는 않는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그것은 일어날 법한 일의 범주에 들어있다. 사람이라도 치이면 놀라서 119에 신고를 하겠지만. 사람들은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교통사고 소식에 무덤덤하고, 도심에 서있는 오늘의 교통사고 부상자, 사망자 숫자에도 무덤덤하다.

 

 나는 그 녀석을 본 적이 있었다. 비 오는 날 서점 앞에 놓여있던 양철 밥그릇을 조심스레 핥아먹던 모습. 가까이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자 경계의 시선을 보내며 멀리로 도망가던 모습. 사진기를 들이대자 멀뚱멀뚱 쳐다보던 모습. 나는 그 꼬질꼬질한 털의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다. 털에 가려 흐릿하게 보이면서도 경계심에 찌들어 있던 그 눈가의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상상도 하지 못 할 정도로 험한 생존의 싸움을 벌여왔을 생명. 그러나 그 저력도 눈먼 자동차 앞에선 별 쓸모가 없었나보다. (마치 개인이 아무리 바둥거려봐야 거대한 경제 체제나 국가의 군사력 같은 것에는 짓밟혀버리듯?) 개미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모습. 털에 덮혀서 보이지 않는 얼굴.
 간밤에 그 녀석을 친 자동차의 운전대를 잡고 있던 사람은 그래도 그 주검을 가로수 아래에 옮겨두었다. 아니, 다른 사람이 옮겨둔 걸지도 모르지. 어쨌건, 죽음의 책임을 그 사람에게 물어야 할까? 어쩌면 그 사람도 희생자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세상 일이란 다 우연이다. 우연 앞에서 무력한 사람들. 우리는 우연 때문에 책임을 지고, 우연 때문에 이익을 얻고, 우연 때문에 행복해하고, 우연 때문에 불행해한다. 개개인에게 책임이 없다는 식의 도피 논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존재 자체가 우연이라는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는 그 존재의 우연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다만 형법이 과실치사와 고의적인 살인을 구별해서 처리하듯이 우연에도 정도는 있다. 적어도 그 사람이 녀석을 칠 생각으로 차를 몬 것은 아니리라.
 조금 지각할지도 모르지만 장갑이라도 끼고 녀석의 시체를 옮길까 해봤지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체에는 생명으로서의 의미가 별로 없다. 생명이란 활동이자 현상이다. 사실 시체에 의미를 주는 것은 다른 존재들이다. 그 외관상 그것을 바라보는 다른 존재들의 의식 속에서 동일성이 유지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생명 활동의 의미가 별로 없는 그 시체와 생전의 존재가 동일함을 과감히 부정해왔다. 결국 내가 그 시체를 옮기고 싶어한다는 것은 그 횡단보도 옆 가로수 아래 그 자리에 그것이 자리잡고 있음을 내가 보기 싫어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생전 그 녀석이라거나 지금 시체에 한창 달려들고 있는 개미들의 입장에서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일이다. 그렇게 자의적인 기분으로 굳이 그것을 옮기는 일이 좋은 일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기분 문제를 제외한다면 시체와 다른 쓰레기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해도 좋다. 만화 「기생수」에 주인공이 죽어가는 개를 돌보다가 죽자 쓰레기통에 버리는 장면이 있는데, 그와 비슷해져버린 걸지도. 그렇게, 나는 슬픈 심정으로 그 시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일주일 전에는 밥그릇을 게걸스레 핥아먹다가 지금은 이렇게 누워있는 몸뚱아리에 대한, 그리고 정지된 생명 현상에 대한 연민과 동정과 공감…. 나도 언젠가는, 불시에 죽을지도 모른다.


 

 흔하게 태어나고, 흔하게 죽어간다. 그것도 우연하게. 우리들은 그런 면에서 비참하고 무력하다. 비참하고 무력한 만큼 우리들은 열심히 살아간다. 우연히 살아남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나는 죽은 후까지 걱정할 생각은 없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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