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화장실에 들어가면 내게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

공현 2009. 5. 22. 22:13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서울인권영화제를 하면서 "표현의 자유"에 관한 글들을 받는데,

남성이 내가 치마를 입는 것도 일종의 표현의 자유로서 다루고 싶다고 하셔서 쓴 글입니다.
줄바꿈 등은 약간 읽기 편하게 바꿨습니다.


13회 서울인권영화제는 "표현의 자유"를 외치면서 청계광장 등에서 6월에 열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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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들어가면 내게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

공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익숙한 편이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상당한 기행(奇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왔기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떠어떤 것들 때문에 주목을 끌었는지 하는 이야기는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다만 고등학교 때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한 이래로는, 거의 전교에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는 것 정도만 알아두시라.)

  게다가나의 평상복은 생활한복이 90% 이상에다가 머리는 꽤 긴 편이라서, 어차피 어느 정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가장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을 때는, 무슨 눈에 띄는 거리 퍼포먼스 같은 거 할 때를 제외한다면, 바로 치마를입고서 돌아다닐 때다.

  나한테는 치마가 세 벌 있는데, 한 벌은 고등학교 때 친구가 선물한 건데 소화하기가 좀 난감해서입고 다니지 않고 있고, 주로 입는 것은 청치마와 인도풍 치마이다.
  청치마에는 위에 보라색 무늬의 남방을 주로 입고, 간혹 하얀생활한복과 맞춰 입기도 한다. 인도풍 치마는 방울이 달린 녹색 치마인데 하얀색 인도풍 상의와 세트여서 같이 입는다.
  인도풍 치마쪽은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나있는 모양새라서 추위를 잘 타는 내가 입고 다니긴 좀 춥다. 그래서 주로 청치마 쪽을 자주 입게되는데, 나 자신도 부담스러운 내 다리털들은 무릎양말로 가린다.(한때 다리털을 밀어보았으나 밀어도 밀어도 끝이 없는 다리털들에포기하고 그냥 무릎양말로…)

  내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로 시작하는 남성으로 분류되어 있는데다가 외모도 그렇게 여성 같진않기에(최근에 파마를 했는데 좀 더 여성 같을지도 모르겠다.) 치마를 입고 돌아다니면 아무래도 사람들 눈에 확 띄나보다.


  음? 왜 치마를 입냐고? 글쎄… 사실 나도 그렇게 듣는 이가 만족할 만한 답변을 제시해 줄 수는 없다. 남성은 치마를 입을수 없는 사회적 규범과 고정적인 성별 규범에 대한 반감이 치마를 입는(그리고 머리를 기르는) 이유 중에 하나이긴 하지만, 사실그렇게 의식적으로 ‘여성의 옷인 치마’를 입는다고 생각하고 코디하는 건 아니다.

  그럼 내가 ‘크로스드레서’냐 하면, 별로그렇지도 않은 게 나는 속옷이나 디테일한 부분까지 이 사회에서 여성이 입는 것으로 분류된 복장으로 맞추지는 않으며, 그냥 치마를입을 뿐이다.

  그건 뭐랄까, 마치 “왜 생활한복을 입습니까? 민족주의자입니까? 전통문화나 예술 관련 일을 하십니까? 동양철학전공자십니까?” … 같은 질문들을 받는 느낌과 비슷하다. 치마든 생활한복이든 그냥 내가 찾아낸 편하거나 예쁜 패션일 뿐이라고생각하면 안 되나. 사람들에게 “왜 청바지를 입습니까?”라고 묻는 일은 별로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좀 짜증도 나는 노릇이다.



  여하간 치마를 입고 다니다보면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많다.

  일단 시선 집중은 기본이고, 한 번은 지하철에서 어느 6~8살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 분이 “엄마 저 사람은 남자야, 여자야?”라고 큰 소리로 물어보자, 그 여성의 모친으로 보이는 여성 분이“쉿!”이라고 하며 혼을 내셨다.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랑 얽히면 안 돼.”라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보면서 혼내진 않으셔도되는데 말이지. 물어볼 수도 있지 뭘 그리 과민반응하셨던지….

  또 한 번은 교육부 앞에서 교사단체인가 교대생들인가가 하는 집회를갔는데, 다른 단체 사람이 “아저씨 팬티 보여서 민망해요, 앉아 있지 말아요.”라고 해서(그때 난 그래도 나름 다리를 오므리고얌전히 앉아 있었는데!) 상당히 모멸감을 느낀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며 동시에 스스로도 좀 곤란할 때는 화장실에 갈 때다. 남자 화장실에들어가면 시선 집중은 피할 수 없고, 화들짝 놀라는 사람들도 종종 보게 된다.

  치마를 안 입었을 때도 머리가 길어서 그런지흠칫흠칫 놀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시는 분들(어째서인지 대개가 나이가 좀 많은 분들이다. ‘머리 긴 남자’가 익숙하지 않은건가?)이 좀 있는데, 치마를 입고 들어가면 부담스럽고 미안할 정도로 놀라시는 분들도 종종 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일부러 참고공중화장실은 안 가기도 한다. 여자 화장실을 들어갈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지만 그랬다가 경찰서에 끌려갈까봐 그건 무서워서 못하겠다. -_-;;
 
  그래서 나는 여/남으로 구별된 화장실 체제에 반대하는 트랜스젠더인권단체의 주장을 적극 지지한다.

  내가 내 개성이자 정치적문화적 실천으로 치마를 입기로 한 이상 어느 정도 쏟아지는 시선들은 각오하고 견뎌내야 할 문제겠지만, 화장실에서의 문제는 정말 견뎌내기 어렵다.

  표현의 자유는 단지 특정한 내용의 표현들(흔히 생각하기에는 '정치')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고전적인 경구를 다시 상기시키자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이다."

  어떤 정책이나 정치인, 정당 등에 대한 발언 뿐 아니라 두발복장자유나 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표현들 또한 표현의 자유가 적용되는 영역이며, 그 모두가 인간의 자기 표현으로서 가치가 있다. 내 치마 코디는 기존 성별 규범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점에서도 그리고 그냥 나의 개성적 패션이라는 점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치마 입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거나 탄압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너무나 견고한 '상식'들과 여러 가지 구조들이 나의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있는 것은 제법 분명하다.


  최근에 미국인가 어느 나라에서는 차별금지법에 "sexual expression", 즉 성적인 외모/복장/자기표현 등에 대한 차별도 금지하는 조항을 넣었다는 소문도 들리던데, 제대로 된 차별금지법조차 없고 성별 고정관념도 제법 견고한 이 땅에서는 아직 요원한 일인 듯하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머리 기르는 것만 가지고도 온갖 잔소리를 하며 군대 가라고 하는 친척들에게 치마 입은 모습을 보여주면 얼마나 난리가 날지…;


  마침 오늘, 이제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 또 치마를 입고 돌아다닐 수 있겠지, 하면서 서랍에 넣어둔 치마를 세탁기에 던져 넣었다. 혹시 나중에 인권영화제 등에서 이 글을 읽은 분들이 나를 볼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