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두 가지 죽음

공현 2008. 1. 13. 22:24

두 가지 죽음

(2005년 1월)

 눈이 내렸다. 본래 전주는 평야지대치고는 눈이 조금 많은 편인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곳들은 폭설이라고 난리를 치는데 비하자면 눈이 그렇게 많이 오지는 않았다.
  눈이 내릴 때면, ‘애들은 좋아하고 어른들은 걱정한다.’라고 종종 말하는 듯한데, 그렇다면 나는 어디쯤 속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에 머리를 긁적여본다. 얼음 가루 같은 눈이 천 원짜리 분홍색 우산에 맞아 튀어 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우산을 치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사실은 눈을 맞으면서 강아지마냥 빙빙 눈 내리는 속을 돌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곧 만날 ‘어른’이 또 눈을 맞고 왔다면서 호들갑을 떨 것 같아서 우산을 쓰고 가야 했던 나는.
 누군가가 눈이 쌓였다가 녹은 자리에는 검은 구정물이 나온다고 하며 눈 맞기를 기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확실히 과학이란 것은 비나 눈이나 아무래도 좋은 문제니 눈이라고 특별할 것 없다고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는 산성비라고 맞는 것을 꺼리면서 산성이긴 마찬가지인 눈은 맞고 다닐 이유 같은 건 소위 그 “합리성”이란 것을 가지고는 찾기 어려운 것이다.
 

 잠시 다른 데로 이야기를 돌리자면, 눈 쌓인 날 아침, 언덕길에 연탄재나 흙이 뿌려져 있는 장면 같은 것도 인상적인 풍경 중 하나이다. 온통 하얗게 덮인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꿈과 같은 것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약간 불쾌한 아쉬움 같은 것을 느끼며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 그 ‘미끄럼 방지’야말로 인간의 딜레마라는 생각을 한다. “아름다운 것을 즐기면서 미끄러질래, 아니면 미관을 해치지만 미끄러지지 않을래?”

 인간이 예술이나 유희를 한다는 것은 의식주 같은 생존과 편의의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칼 맑스에 따르면 경제와 같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짓는 만큼, 법체계, 이념, 예술, 학문, 문화 같은 것들은 모두 그것보다 뒤에야 신경 쓸 것이 되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란 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서, 대한민국에서 예술 계열이라거나 철학 같은 소위 ‘배고픈’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의 발목을 사정없이 붙잡곤 한다. 거기다가 인권운동이라거나 노동자, 환경 문제, 평화주의 같은 것들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종종 하는 무장이, 그 소위 ‘현실주의’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에 대해서는 인간은 예술이나 유희, 이상이 없이는 심심해서, 허무와 무의미에 질식해서 살 수 없다는 식의 또 다른 현실주의로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야 먹고 사는 문제 외의 것들이 어쨌든 그 아래로 밀려나버리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세상이 그렇게까지 단순한 것은 아니다. 하부구조론의 변형인, ‘중층결정’이라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최종 심급'이라는 고독한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먹고 사는 문제 외의 것에도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긴 하다.

 
 ‘아무리 그래도 현실은 현실이야.’라는 둥의 소리를 한다면, ‘먹고 사는 문제란 건 무시하지 못해’라는 냉혹한 소리를 한다면, 나는 그 ‘사는 것을 위한 반론’에 대해 역시 생명을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주 어린 아이에게는 특별히 ‘의식’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의식’은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의식에는 ‘자의식’이란 것도 있다. 자의식은 자아에 대한 반성의식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란 소리이다.
  의식은 존재를 규정짓는다. 인간이라고 하는 세포의 집합체가 통일된 ‘개체’로 스스로 취급하는 이유는 의식 때문이다. 주체와 외부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선, 그것은 의식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 몸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내가 먹은 음식물들이나 공기 같은 외부의 것들로 이루어진 것인데도, 그것을 따로 구분하는 것은 그 자의식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과 다른 대상에 대한 의식이 사실상 자기 존재와 다른 존재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있는 생명은 두 가지 죽음을 가진다. 생명활동의 정지라는 형태의 죽음과, 자의식의 파괴라는 죽음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후자가 거의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데에다가 그것은 가시적이기 때문에 전자가 항상 더 중요하게 보이지만, 후자의 경우 또한 그렇게 가볍게 여길 문제는 아니다. 자아라는 의식의 다발이 단절된다는 것은 곧 자기동일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어제까지의 내 기억들이 모두 타인의 기억처럼 느껴지고, 아침밥을 먹으면서, 세수를 하면서 과거를 부정한다. 그렇게 되면 자기 존재라는 것의 근거는 하나도 없이 부유하는 순간만이 남을 뿐이다. 설령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 또한 자신의 과거로부터 연속된 무엇이어야만 자의식은 ‘나’를 보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이 없는 상태라면 모를까 이미 의식이 나라는 존재를 만들고 있는 이상, 존재는 그 의식의 지향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술이나 어떤 추상적인 가치, 의미 같은 것도 그러한 생명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 삶을 위해서, 때로는 전(前) 의식적인 생명도 도외시할 수 있는 것이 ‘존재’이다. 생존권을 위협당하면서 자기 이상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시위를 위해 분신자살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그런 의미에서 ‘의식’의 생명이 전 의식의 생명을 압도해버린 경우라고도 할 수 있다. 어느 쪽의 생명이, 삶의 방식이 더 가치 있는지 같은 것은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며, 그것이 개인의 ‘선택’의 문제인지조차 사실은 의심스럽다. 그저, 그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기 때문인 것일 수도 있다.



눈이 내리고 있다. 우산을 치우고, 눈을 맞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바람과도 관련이 있는 것일지 모른다. 살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식의 역설이, 꼭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정신을 차려봤을 때, 이미 사람은 살아 있었다. 움직이는 물체가 외력이 없는 한 움직이려고 하는 관성처럼, 사람이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관성이다. 하지만 그런 관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썩 유쾌하지는 않다. 따라서 그에 대한 반항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삶에 대한 의지와 죽음에 대한 바람. 단순한 관성을 떠나서 삶을 가속하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려 하는 의지와, 그 관성 자체에 거스르는 방향으로의 소망. 그와 같은 삶의 관성에 대한 반항이 예술이라든가 이상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아무래도 완전한 어른이란 없을 것 같다. 꽤나 비뚤어진 노릇이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모양이다, 사람들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