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대통령은 '왕'인가? -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분위기에 내포된 위험성

공현 2009. 5. 28. 20:45


원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서는 더 글을 안 쓰려고 했다. 어차피 넘쳐나는 게 그 이야기들이라서, 내가 굳이 말을 더 보태야 하나 싶었던 거다.

그러나 아무래도 한 마디 정도는 더 해야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서, 노무현 씨 생전의 정책이나 태도들이 어떠했나 하는 이야기들은 이미 여기저기 들어가서 뒤적거려보면 많이 보이니까, 굳이 내가 첨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행위들이 내재하고 있는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짧게라도 지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이텐(YTN아님;)뉴스의 전유경 아나운서께서
"
야구장에서 치어리더가 없어졌다, 왜 방송국에서 예능을 안 하느냐, 왜 포털사이트 메인페이지가 무채색이냐고 불만을 토로하시는 분들이 옆에 계시다면… 그냥 싸다구 한대를 날려주시던지 입에 재갈을 물려주시기 바란다"라고 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거기다가 그걸 놓고 "개념있다"라거나 "속시원하다"라고 말하는 '대세'를 접하고 특히 심각성을 느꼈다;; -_-;
관련 경향신문 기사

(아, 근데 치어리더는 원래 좀 없어졌으면 하긴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애도/추모하자는 것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나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왜 이렇게 전국적으로, 장기간 호들갑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건 '인간에 대한 예의' 같은 수준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레벨이 아니다.

온갖 문화공연들이 다 취소되고 연기되고 있고, 대학교 축제들도 연기되고 있으며, 퀴어퍼레이드도 연기되었다.
그걸 연기하거나 취소한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건 아니다.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타당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일요일에 예능 프로그램 하나 방송했다가 몰매를 맞은 방송사도 있으니 말이다.
내가 비난하고 싶은 건 "그런 걸 하면 안 된다", "전 대통령이 죽었는데 그런 걸 하는 건 무개념하다"라는 식으로 흘러가는 이 '대세'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대통령'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는 영웅주의적 정치 지형(정확히는 엘리트-대의제)의 폐해로 보인다.

엘리트주의-영웅주의에서 비롯되는 감정-행위를 '인간에 대한 예의'로 포장하지 마시라, 제발.
나는 지금의 이 추모 분위기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이 두렵다. '국민주의'가 두렵다. 폭력성이 두렵다.



내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놓고 "민중의 왕이 돌아가셨다."라고 말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민중의 왕은 당연히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왕이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민중의 왕이건, 귀족의 왕이건, 독재의 왕이건, 왕은 죽어야 한다.
귀족들의 왕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이더라도, 종국에는 민중의 왕조차도 사라져야 하는 게 민주주의다.
홍세화 씨의 표현을 빌린다면, 왕을 단두대에 세우고 처형한 후에야 이루어지는 게 민주주의다.
(그러나 오히려 노무현은 죽음으로써 민중의 왕으로 등극한 것 같다. 이건 뭐..)





노무현 씨도 생전에 대통령이란 한낱 직책에 지나지 않으며 대통령의 권력, 중요성, 위상을 줄이고 낮춰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노무현 씨를 민중의 왕이니, 국부니, 영웅이니, 영원한 대통령이니 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노무현 씨의 정치를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비판에 대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덕이 있고 훌륭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토록 추앙받는 것이라고 반론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에 노무현이 대통령이 아니라 그냥 훌륭하고 덕이 있는 명사 정도였다면
이렇게 호들갑을 떨고, 축제나 공연(이나 투쟁)을 죄다 연기하고, 전국민이 일주일 동안 추모하며 사는 게 당연하다고, 그런 거에 토 다는 놈은 "무개념"하고 "싸다구를 날리거나 입에 재갈을 물릴" 놈으로 만들 수 있을까?


아무래도 지금의 현상들은, 특정한 소수의 인물들이 강조되고 상징이 되는 엘리트적 대의제의 폐해라는 혐의를 피해갈 수가 없을 것 같다.
진정한 의미에서 민중 또는 인민이 주인이 되며 평등한 민주주의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지 훌륭하고 인망있는 인물의 죽음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하겠지만, 이런 식의 '국민이라면 당연히 슬퍼해야지' 같은 류의 반응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거기다가 노무현이 그토록 부각되는 것 자체도 '인물'로 '정치'를 표상하고 대신하는 엘리트 대의제이기에 가능했던 것 아닌가?
민주주의 같지 않은 민주주의(대의제 엘리트정치)의 정치 현실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할 뿐이다.
(사실 "킹메이커"니 뭐니 하는 말도 그렇다.)



무직인꿈틀이가 쓴 글에서 일부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
단지, '망자에 대한 예의'에 대해선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 전직 대통령 외에도 노동자, 철거민, 청소년도 같이 추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꿈꾸던 '사람사는 세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직 최고지도자도, 일개 시민도 같이 추모받을 수 있다면 그의 '이상'에 좀 더 가까워진 사회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