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예쁘지가 않잖아!

공현 2008. 1. 13. 22:26

예쁘지가 않잖아!


(2005년 2월)

 내가 중학교 때 같이 돌아다녔던 몇 안 되는 동급생 중 한 사람은, 그 성격이 꽤나 재미있는 녀석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다른 애들에게는 짜증나게 비쳤는지, 종종 구박이나 놀림을 당하곤 했기 때문에 그럴 때면 내가 또 나서서는 다른 사람과 대신 실랑이를 벌였었다. "정말, 좀 애들에게 그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좋으련만"이라고 항상 생각했었다. 나도 그런 때로는 애교스럽고 때로는 시끄러운 그를 다소 귀찮아 할 때가 가끔씩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웃으면서 지낼 수 있어서 싫지는 않았다. 만난 지 3~4년은 족히 지난 지금, 나를 기억하고 있으련지?

 그가 내게 하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예쁘지가 않잖아!" 이다. 그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무엇이건 간에 내가 해놓은 것을 보면 괜히 한 번 "예쁘지가 않잖아, 다시 해!"를 외치곤 했었다. 명백한 농담조였기 때문에 때때론 - 특히 내가 정말 열심히 뭔가를 해놨을 때는 말이다. - 그 말에 신경질이 나기도 했었다. 그 녀석이 그 말을 정말 깊은 의미를 가지고 한 건 아니었던 것 같지만, 지금 와서는 그 말이 또 내게는 지침이 되어주고 있는 것 같다. 습작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얼마 뒤, 그 말이 문득 와닿았던 것이다. 그 "예쁘지가 않잖아!"가 새삼 한 걸음 더 다가온 것은, 아래와 같은 글을 읽을 때였다.



모든 것은 아름다워야 한다

 "저 건물은 예쁘지가 않아. 왜 저렇게 지었을까? 너 보기엔 어떠니?"

 "내가 보기에도 맟나가지야. 조금도 예쁘지 않아."

 개선문에서 멀지 않은 파리의 서쪽 관문인 마이요문 광장에는 온통 파란 유리로 된 신형 건물이 하나 서 있다. 그 건물을 가리키며 일곱살 쯤 되어 보이는 두 소녀가 주고받는 말이다. 인형을 놓고 말하듯 건물을 대상으로 의견을 말하는 모습이 깜찍스러웠다.

 두 소녀는 특별난 아이들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이 보기 좋아야 하는 사회환경, 가정환경에서 자라났을 뿐이다.

(홍세화 씨,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 신문사) 中)



 여하간, 세상에 아름다워서 좋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간혹 '사랑하니까 아름다운 것인지 아름다우니까 사랑하는 것인지'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역시 제일 처음에는 아름다우니까 사랑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 다음 단계에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답지 않은 부분까지 사랑스럽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사랑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사람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어서, 한 사물을 놓고도 "백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사랑이 있"듯이, "백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아름다움"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모든 것은 아름다울 가능성이 있다. 이외수 씨의 소설 중에서 소년에게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을 찾아오라고 하는데, 소년은 아무 것도 찾아오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 더러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 것이리라.

 하지만 설령 그렇다해도, 비슷한 문화권, 문화적 거리가 가까운 사람끼리 공유하는 미적 기준이라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민주주의적인 문화를 내면화한 사람들이 사상범 수용소나 학대받는 사람들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고 찬탄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 같은 경우에는 사회변동이 짧은 시간 동안 심하게 일어난 탓에 문화적인 세대의 차가 큼을 느끼곤 한다. 예를 들면 머리를 짧게 깎은 군인들이 군복을 입고 거수 경례를 올려붙이는 광경을 보고 누군가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질서정연하게 줄 서 있는,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고 예쁘다고 말한다. 비슷비슷한 스포츠 머리를 예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내게는 그것이 정말 보기 싫은 것 중 하나이다. 적어도 그 광경 하나로 국한시켜 생각할 때, 북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간혹 나오는 그 '발맞춰 착착 걷기'와, 특별히 다른 게 무어란 말인가? 나름대로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그건 정말 "예쁘지가 않잖아!"의 대상이다. 내가 군대라는 조직을 싫어하는 이유는, 군대는 철저하게 관료제나 효율의 폭력이 지배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배는 "전쟁"이라는 목숨이 오가는 상황 속에서(혹은 그 상황을 가정한 상태에서), 오직 살아남는 것, 적을 잘 죽이는 것 등의 목적에 맞는지 여부, 곧 합목적성의 잣대를 통해 정당화된다. 나처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쪽으로 기호가 편향된 사람으로서는, 거기에는 "미"이고, "선"이고, "정의"이고 뭐고 없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사실 주변에는 "예쁘지가 않잖아!"가 널려 있다. 와이셔츠에 양복을 입고, 혹은 작업복을 입고 출근하는 사람들, 매일 교복을 입고 머리를 깎은 학생들을 보면, 역시 참 "예쁘지가 않잖아!"다. 물론 그 얼굴의 표정들이란 것은 각자, 그래도 아직은 살아 움직이고 있지만, 그 아래, 혹은 위로 시선을 움직이기만 하면 금방 군대와 비슷한 본질을 가진 것들에 마주쳐버린다. 최승어 시인의 "북어"라는 시가 떠오른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중략)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대학 입시라는 목적에 맞는지, 그것만으로 판단되고 정당화되는 질서.


 얼마 전에 초등학교에서 전체 시험을 부활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학력저하를 막겠다고 하는 것이란다. 그런데, 학력저하를 극복할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게 고작 객관식 문제나 단답형 문제로 일괄 시험을 쳐서 애들을 줄 세우는 것이라니, 참, 그 발상이라는 것을 가만히 보면, 한국의 교육부는 입으로만 '창의성', '다양성'을 외치고 실제로는 '획일성'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 설령 그 성적을 발표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의 답을 기준으로 내세워놓고 그 기준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로 학생들의 실력이란 걸 판단한다는 점에서 결국 그것도 줄세우기일 뿐이다. 등수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줄세우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짧은 생각이다.


 프랑스의 한 미술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왜 미술시간에 학생들에게 석고 데생을 시키지 않느냐구요? 그건 아주 쉬운 얘기입니다. 유치원생에게, 그리고 초등학생과 중학생에게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닙니다. 아동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을 보는 눈과 미적 상상력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그렇습니다. 석고 데생은 나중에 미술학교에 가서 하면 되고, 실제로 미술학교에선 많이 실시하고 있습니다. 아동들에게 석고 데생을 시켜선 안 되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의 모델을 주입시켜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석고상은 하나의 모델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뿐인 진리가 아닙니다. 석고상을 보고 데생을 하라고 하면 가치관을 획일화시키는 위험이 있고 따라서 창조적 개성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을 놓고 그리게 하면 아동들끼리 그린 것을 서로 비교합니다. 아동들끼리 우열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서른 명의 학생이 하나의 죽은 정물을 바라보는 모습은 전혀 아릅답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홍세화 씨,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 신문사) 中)



 마찬가지로, 모든 학생들이 점수를 맞기 위해 하나의 답을 써내는 모습도 전혀 아름답지 않다. 어떤 사람은 아름답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양함, 활기참, 어린이의 꿈, 자유와 같은 것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아름답다고 여길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경우 교과서 텍스트는 하나의 석고상이고, 아이들은 시험이랍시고 그 석고상만 죽어라 데생하고 있는 셈이다. 모델일뿐인 것을 정답인 줄 알고서. 정말, 뭔가 새로운 교육 방법이란 것을 떠올리지 못하고, 그저 애들을 경쟁만 시키면 실력이 오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야, 가시적인 실력은 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길러진 대다수는, 정물 데생 밖에 못하는 아이들일 것이다. 주관식으로 시험을 보면 그 점수 기준에 부모들이 난리를 친다고 하지만, 초등학교 때 성적이라는 것이 학원 다녀서 올릴 수 있는 게 아니며 또 인생을 결정짓지도 않는다는 것을 부모들이 깨닫도록 해줄만한 교육과정과 시험 방식을 만들어낼 결단력도 없단 말인가, 교육부는. 초기에 나오는 부모들의 항의 같은 것을 달래가며 그것을 정착시킬 능력도 없단 말인가.

 주관의 형태로 모든 아이들이 그 주장의 잘못이나 허점을 지적받고, 토론하고,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교육이, 대화가, 적어도 초등학교라도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우리들은 합목적성, 목적합리성이나 효율만 따지는 것을 보거든 한 번쯤은 진(眞)선(善)미(美)의 이름으로(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_-) 이렇게 외쳐 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예쁘지가 않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