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것같은꿈

까맣게 다운되다

공현 2009. 6. 6. 02:26


인권영화제에 갔다가 울면서 집에 왔다.

물론, 영화 한 편 안 보고 왔기 때문에, 훌륭한 인권영화를 보고 감동 받아서 운 것은 아니다.

난 제방 끝에서 다시 돌아오고 있을 뿐이다.


머리 속을 오가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두뇌가 다운되어버리는 것처럼 까맣게 되어버리는 순간을 오래간만에 겪었다.
지하철에서, 잠든 것도 아니었는데, 한순간 까매졌다가 정신을 차리니 20분이 지나가 있었다.


분노의 원인을 해명한다고 해서 분노가 원인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내 설명에 속아왔다. 행동도 실천도 없는 사과와 위로는 언제까지 나에게 가치가 있을까.(아직까지는 있다.) 나는 그때 어떤 행동을 해야 했을까. 폭력과 사랑의 경계는 어디일까. 의무와 욕망과 가능의 일치와 불일치. 세계가 자기마음대로 되어있지 않다고 화를 내는 건 바보다. 내가 바보라는 건 부정할 생각 없지만 그래도 뻔히 바보처럼 보일 행동을 밖으로 드러나게 하고 싶진 않다. 그런 걸 신경쓰는 난 이미 바보가 아닌가? 단지 겉마음과 속마음의 차이일 뿐? 타인에게 전달하지도 않은 주제에 알아주지 않았다고 투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타인에게 보낸 신호가 캐치되지 않을 때 지치는 정도는 무난하다. 내가 왜 니 사정을 신경 써줘야 하니. 젠장. 니가 내 사정을 생각하지 않는데. 나랑 공유한 적도 없는 일인데. 너와 나의 친분을 이유로? 내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은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 앞에선 분노가 무뎌져서인가. 대중이라는 게 만약 있다면 증오받아 마땅하다. 그럼 여러분은 어디에 속할 건가. 난 여러분에게 책임을 줄 것이다. 건네준 책임을 여러분이 받지 않을 땐? 그냥 버리면 되나? 아니면 내 품속에 남나. 증발하는 책임들. 그러나 다시 비처럼 쏟아져내리는 책임들. 남아있지 않은 많은 사람들. 변절. 타인의 인생에서 나의 의미. 남아있는 많은 사람들. 불화. 타인의 인생에서 나의 의미. 세계의 요구. 없음. 나의 요구. 이하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