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

하루의 나라 - 그럼 지금 우리 사회는 '일등따윈 되지 않아도 풍요로운'가?

공현 2009. 8. 20. 15:31

하루의 나라 4하루의 나라 4 - 10점
하마나카 아키라 지음, 나카미치 히루 그림/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만화『하루의 나라』를 소개할 때는 쉽게 낚시가 가능하다. "고등학생들이 학교를 점거하고 새로운 독립국을 선포하는 내용이야." 이 말만 들으면 무슨 68혁명처럼 바리케이트를 치고 고등학생들 수백~수천명이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두발자유 보장하고 입시경쟁 철폐하라~"라고 외치고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만화는 그런 장르가 아니다. (실은 나도 이렇게 낚였다... ㅠㅠ)

  학교를 점거한 학생들은 달랑 3명. 목적은 친구의 죽음의 진상을 알리면서, 총리의 음모와 야욕을 좌절시키는 것. 경찰들을 막는 힘은 조직된 학생 대오 같은 게 아니라 일본 정부에 의해 비밀리에 개발된 최첨단 병기 C.A.T ― 눈으로 빔을 쏘고 죽죽 늘어나는 꼬리를 채찍처럼 휘두르고 엄청난 속도와 힘으로 뛰어다니는 고양이 한 마리와 첨단 보안설비가 되어 있는 학교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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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의 나라』는 상당히 잘 만들어진 만화다.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주제의식을 독창적인 설정으로 전달하고 있으면서도 오락적인 요소를 잘 갖추고 있다. 첨단병기 고양이 ‘하루’(원래 죽은 친구의 이름인데, 고양이에게 이런 이름을 붙여준다.)의 성장과 액션, 서서히 드러나는 총리의 음모 등은 이 만화를 한 번 잡으면 놓기 어렵게 만든다. 인물이 평면적이긴 하지만 그건 4권밖에 안 되는 단편에서는 오히려 장점일 수도 있다. 설정에 억지스러운 부분이 좀 있지만 이 정도면 허용 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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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의 나라』는 현재 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파시즘의 가능성을 지적한다. 악당 우두머리로 등장하는 사카키 총리는 일본이 경제파탄과 외부의 위협 속에 3등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있다며, 풍요와 긍지를 가진 일등국을 만들기 위해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 그리고 약한 인간, 멍청한 인간, 의무도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하는 놈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말한다.(인권활동가들은 다 처형임-_-;;)
  파시즘은 사회가 불안해지고 사람들이 이를 강력한 국가를 통해 해소하려 할 때 가능해진다. 마지막 권에 나온 몇 개의 컷은 사카키 총리의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서 꽤 지지를 얻고 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컷은 비평과 인용을 위해서 따온 것입니다. 잡아가지 마세요 잇힝.
어쨌건 사카키 총리.



  이에 맞서 고양이 ‘하루’는 담담히 웅변한다. "어째서 그렇게 ‘1등’이 되고 싶은 거지? … 늘 위를 추구하는 마음은, 결코 채워지지 않아. 하지만, 충만함이 뭔지 아는 삶은 그것만으로 풍요로운 거지. 일등국 따윈 되지 않더라도, 인간은 풍요롭게 살 수 있어." ‘하루의 나라’는 일등국이 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거부한다. 이 만화가 이러한 대안적인 인본주의를 단순히 기존의 보수적 윤리(예컨대, 만화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노약자석 양보 같은)와 구별하지 않는 것은 아쉬움을 느끼게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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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현실에서 묻는다. 사카키 총리 같은 캐릭터가 없더라도, 명백한 파시즘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그렇다면 과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1등’이 되지 않아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사회인가?
  사실 '하루의 나라'가 지향하는 가치는 파시즘 쿠데타를 저지하고 기존의 사회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구조(그게 제대로 된 사회주의이든 뭐든)를 만들어야 가능한 것 아닌가?

  여기까지 쓰고 나니 문득 에리히 프롬과 조지 오웰이 떠올랐다. 파시즘 국가이든, 사회주의-전체주의(프롬 등은 ‘국가자본주의’라고도 부른) 국가이든, 자유주의-자본주의 국가이든,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큰 차이가 없으며 인간은 소외당하고 억압받고 있다고 말한 그들이.
http://gonghyun.tistory.com2009-08-20T06:29:300.31010






다산인권센터 소식지에 원고청탁 받아서 쓴 글인데, 실제로 넘길 때는 분량 제한 때문에 더 줄여서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