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

과연 경제학은 진실을 말하고 있을까? - 『거지를 동정하지 마라?(경제학의 실업이론 비판)』

공현 2009. 9. 23. 17:10


과연 경제학은 현실/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가?



대학교 1학년 때 경제원론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맨큐의 경제학 책을 가져다놓고 수요 공급 균형가격 완전경쟁시장 고정비용 가변비용 기업의 퇴출, 담합... 뭐 그런 것들에 대해 배우는 수업이었다.
그리 모범생은 아니어서 수업 들은 내용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그 중에 교역의 필요성에 대해 배우는 챕터에서 절대우위-비교우위를 설명하던 날은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수업을 듣고서 내가 수업 시간에 질문을 했던 게(무려 질문씩이나 하는 학생이었다;)...
일단 분명히 그 이론은 비교우위가 있는 상품에 주력해서 생산하면 총 효용이 늘어난다는 것은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아까 교수님은 비교우위에 주력하여 생산한 후에 둘 사이에 교환을 통해 둘 모두 이득이 된다고 가정하고 설명을 하셨다. 물론 둘이 교환을 할 수 없다면 비교우위에 주력하여 생산을 하지는 않을 테니 교환이 일어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교환의 결과가 둘 모두에게 이득이 되게 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교환의 비율 등 뭘 어떻게 교환하냐에 따라서 그 총효용의 증대가 양쪽 모두에 이득이 되지 않고 한쪽에는 손해가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지 않나? 
 
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교수는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했다고 가정하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보증은 없긴 하다." 뭐 대충 이런 식으로 답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둘이 완전히 평등하고 합리적인 경제 주체로서 협상을 하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둘 사이에는 서로서로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교환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둘은 완전히 평등하고 합리적인 상태에서 협상을 할 수 있을까? 둘의 합리성과 평등에 대한 가정 말고는 저 분배를 보증할 만한 장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장치가 없는 이상, 교역은 양쪽 모두 잘 사는 전략이 아니라 총효용은 늘리지만 한쪽이 다른 쪽을 착취하는 구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날 수업은 내가 그전부터 의구심을 품어왔던 주류 경제학의 허점 같은 걸 구체적으로 느낀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비교우위이론에 따른 생산으로 총효용이 증가하더라도 그 총효용이 꼭 공정하게 분배되리란 법은 없다.
경제성장률이 몇%가 되고 GDP가 늘더라도 그게 꼭 모두가 잘 살게 하는 걸나 보장은 없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특정 상품의 우위나 경제규모의 차이(환율 등으로 나타나는), 군사력 등등의 요인으로 불공정한 거래를 하게 되고 불평등은 더 심화되는 경우가 더 많다.

가격균형에 대해서 배울 때도, 노동시장도 똑같이 수요 공급으로 설명하고, 가격하한제가 시장을 왜곡시키는 예로 최저임금제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면서...
 '아니 그럼 균형가격이 형성되었을 때 그게 최저임금보다도 아래란 건가? 지금도 최저임금은 완전 쥐꼬리인데? 그거보다 더 아래면 대체 얼마인 건지. 그 임금이 도저히 먹고 살 만큼도 안 될 게 뻔한데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런 생각에 도대체 이 경제원론이란 게 무슨 장난질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었다.  (지금이야 "기본소득 도입ㅋ"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당시 배울 때는 교수야 최저임금이 꼭 나쁜 건 아니다, 라는 식으로 설명하긴 했지만, 그럼 대체 어떻게 하자는 건지, 그런 답은 경제원론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았었다.
노동자들은 가격하한제(최저임금) 때문에 실업이 되어서 먹고 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최저임금도 안 되는 초저임금을 받으며 먹고 살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란 말인가?

그런 경제학적 명제들 앞에서 생각했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류' 경제학은 과연 제대로 된 현실/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현실을 왜곡하는 숫자놀음은 아닐까?






거지를 동정하지 마라? - 10점
로랑 꼬르도니에 지음, 조홍식 옮김/창비(창작과비평사)




거지를 동정하지 마라? - 경제학의 실업이론 비판
초판 2001년
지은이: 로랑 꼬르도니에                          옮긴이: 조홍식
펴낸곳: 창작과비평사



  이들은 실업자들이 결코 불행하지 않다고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실질적으로 실업자들은 참지 못할 정도로 불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실업이론은 이같은 광경이 초래하는 도덕적 상처를 가리기 위해 붙이는 반창고 역할만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과학적인 설명이 진정 필요한 부분은 실업기간 동안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게으르다고 보는 것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가장 부도덕하고 충격적인 부분인데, 그렇다면 일이 없는 노동자들은 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고통스런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경제학은 이들이 겪는 고통의 광경을 은폐하기 위해 또다른 쇼를 준비한다. 이 쇼에서는 실업자들이 부자이며 이익을 누리려 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수혜자적 상황에 빠졌고, 그 책임 또한 그들에게 있다고 보여준다.
책 pp.95-96


"경제학의 실업이론 비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주류경제학의 환상들에 대한 알기 쉬우면서도 통렬한 비판이다.

(대개 신고전주의/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자발적 실업'과 같은 사람 홀리는 말을 써가며 실업의 원인은 노동자들한테 있노라고 말하며 최저임금과 복지제도 같은 정부의 개입을 배제하라고 말하는 것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론에 기반을 둔 것인지 이 얇은 책 한 권에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다니!

이 책을 읽으면 신자유주의 [노동] 경제학에서 실업이론이라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못 사는 건 게으르고 못나서다"라고 외치던 저 [자유방임주의적이고 기독교도덕적인] 자본주의초기 담론을 더 복잡하고 이론적으로 꼬아놓은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아~주 합리적으로 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목표를 빨리 간파할 수 있다. 실업은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의도적인 행동의 결과이며, 따라서 불만이 있는 자들은 자신의 책임을 깊게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자유주의 담론의 문제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분열증에 가까운 심각한 상태인데, 논리적 사고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런 증상을 보이게 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만들어진 실업이란 자발적 실업이며, 이는 당사자들이 스스로 인정하고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실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민의 정에 사로잡힌 자유주의자가 이렇게 복지를 누리고 있는 서민들의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유주의적 이상에 기초를 제공하는 유일한 이론에 따르면, 경제활동 인구의 86%를 차지하는 임금노동자들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데 왜 자유주의자들은 최저임금제를 철폐하여 완전고용을 이루려고 저토록 애를 쓰는 것일까? 왜 자유주의자들은 이미 행복해하고 있는 실업자들에게 선을 베풀려고 하는 것일까? 자유주의라는 것이 자본가계급의 경호견이 되려는 정치적 계획이 아니라면(물론 이럴 경우 완전고용이 이뤄져야만 최대한의 이윤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의 관심을 이해할 수는 있다) 이것은 매우 신비한 현상이다…….
책 pp.72-73

이 인용문과 같은 위트와 비꼬는 말들은 이 책의 장점 중 하나이다.
이런 부분들이 나올 때마다 독자들은 통쾌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점잖은 사람들에게 이런 부분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요소일지도 모르지만.)


로랑 꼬르도니에 씨는 주류경제학의 실업이론들을 하나하나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동시에 이를 논박한다.
먼저, 주류경제학에서 가정하고 있는 '노동자' 그리고 '노동시장'의 모델이 대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그리고 마치 여가와 노동을 자유롭고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주류경제학에서의 '노동자'의 모델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를 보여준다. ("경제학에서 만든 노동자는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사먹을지 아니면 15분 더 낮잠을 잘지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번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p.35))

특히 고전적인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고 굉장히 타당한 비판(그러나 잘 수용되지 못하는 비판)을 다시 환기시킨다. 바로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것과 같은 시장도 노동자도 결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결국 경제학은 현실을 분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이 이래야 한다는 당위에 가깝게 되어 버린다. 책의 표현을 인용하면 그것은 "실증적"인 학문이 아니라 "실천적 신화"이다.


  이론가들은 시장을 변호하기 위해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단순화, 추상화, 가설 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변명할 것이다. 좋다. 우리는 항상 '마치 ~처럼'이라는 태도로 임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치 ~처럼'을 너무 많이 하다보면 현실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는가? 실증적 적절성을 전혀 갖지 못한 이 훌륭한 지적 건축물은 하나의 철학일 뿐이며, 일부 사람들이 세상에 강요하려 하는 실천적 신화에 불과하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싶을 뿐인데…… 그 옹호자들은 이런 분석을 가장 지독한 비난으로 생각한다.
책 p.58


그 이후에 책은 "최저임금 때문에 실업이 발생한다", "사회복지제도(예약임금) 때문에 실업이 발생한다", "노조가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늘리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등부터
"게으른 노동자 이론", "겁많은 노동자 이론" 등 노동자들에게 실업의 책임을 돌리는 실업이론들을 차례차례 짚어나간다.



특히 최저임금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유효수요'의 문제   그리고  ▲상호보완적 노동(대부분의 노동들이 그렇다)에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때문에 경쟁으로 한 집단의 소득이 양극화되는 현상에 대해 논의한 것은 이론적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혹시라도 책을 읽기 전에 이런 논의의 요지를 간단하게 맛보기 하고 싶은 사람들은 다음 인용문을 읽기 바란다.


  의심의 여지없이 최저임금의 철폐는 반드시 완전고용을 창출하는 미덕을 발휘할 것이다. 만일 가장 비숙련된 노동자 집단의 임금이 자유롭게 변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임금은 상당히 급격한 폭락 끝에 어느 수준에선가 멈춰서서 시장을 깨끗하게 정리할 것이다. 나는 한달에 10만원 정도라면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기적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이 가격이라면 사업가들은 비숙련 노동자의 고용을 분명히 늘릴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여기서는 당연히 신고전주의자가 즐겨 사용하는 우화를 소개해야 한다. 최저임금이 100만원일 때 노동조합의 독점권이 제공하는 이익의 일부분을 받으면서 풍요롭게 생활하던 노동자들은 임금이 10만원으로 내려가면 집으로 돌아가 화초나 키울 것이다.
... (중략) ...
  하지만 지적 정직함이 있다면 어떤 임금 수준에서 이런 이론이 현실화될 수 있는지를 밝혀야만 한다(이런 작업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비숙련 노동자의 임금 유연성을 막고 있는 요소들을 제거할 경우 임금이 즉각적으로 폭락할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는 정통 이론이 말하는 것과 다르지만 말이다. 다시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면 최저임금제는 실업의 원인이 아니라, 실업의 가장 비참한 결과를 제한하는 구원의 방파제인 것이다.
  우선은 자유주의 담론의 기초가 되는 이론의 시발점에서부터 살펴보자. 사람들은 최저임금을 받는 자들이 가장 낮은 (한계)생산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일부가 실업상태에 있는 이유는 최저임금이 같은 직종의 비숙련 노동자의 완전고용에 해당하는 (한계)생산성보다 높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사업가들이 합리적이라면 비숙련 노동자들의 (한계)생산성이 최저임금보다 떨어지는 순간 이들의 채용을 중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고용의 문이 닫히는 것은 어느 노동자가 전체 노동의 생산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최저임금보다 조금 적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예를 들어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 고용주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 1년에 1800만원이라고 하자. 이는 르노(Renault)의 고용주가 공장에 한 명의 비숙련공을 채용하더라도 1년 동안 라구나(Laguna) 자동차 한 대도 더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 한 명의 1년 자동차 생산량이 평균 열여섯 대 가까이 되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경제학자들이 우리에게 르노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 한 명을 더 채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너무나도 낮은 그의 생산성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한계생산성이 정말 극적으로 하락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신기한 역설 중 하나는 숫자가 나오기만 하면 경제학자들은 꼬리를 내린다는 것이다.
  르노의 고용주는 아마 추가로 노동자를 채용하지 않는 이유가 한계생산성이 낮기 때문이 아니라 추가로 자동차를 생산하더라도 이를 구입할 수 있는 수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기업이 노동자의 채용을 중단하는 이유는 노동자의 생산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수요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떤 신비로운 요정이 나타나 완전고용의 상태에 가까이 가기만 하면 갑자기 노동자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수요의 한계라는 가능성을 잠시 고려해보면, 최저임금제 같은 제도의 필요성과 효율성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다. 최저임금이 실업의 원인이 아닐 뿐더러 유효수요의 부족으로 발생한 실업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매우 유용한 장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책 pp.74-77


  경쟁제도에서 피해를 보는 자들은 다른 종류의 경쟁자들보다 필요로 하는 일의 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수가 많은 사람들이다. 만약 어떤 회사의 이사(理事)가 최저임금의 100배(간단히 말해서)를 번다면, 피아노 이사 우화의 경우 이 사람은 꼬리일꾼인 셈이다. 좀더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사는 경리와 경영을 담당하여 돈을 셀 줄은 알지만(그의 능력) 노동자처럼 나사를 돌릴 줄은 모르기 때문에 경영 인력에 비해 육체노동을 제공하하는 노동력이 과잉공급되는 상황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육체노동자들이 이사들처럼 경리를 담당하거나 경영을 할 수 없다고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저임금제 같은 제도의 기능은 시장에서의 경쟁으로 인해 협상력이 취약해진 노동자집단의 소득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중략)... 따라서 최저임금은 일부 노동자들에게 강요되는 '이중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한 정의의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이중의 고통이란 실업으로 인해 이들의 임금이 계속 하락하는 경향을 보여주기 때문에 나타나는 고통과 바로 이 하락 경험을 초래하는 요인인 실업이라는 고통이다.
  전통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최저임금에 대해 반대입장을 보일 때 그것이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성격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는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문제는 이 최저임금이 비숙련('비숙련'이란 것은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노동자의 한계생산성과 비교해보았을 때 너무 높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담론은 유효수요의 부족이라는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의 무능력(또는 의지의 결핍)을 감추는 데 필요할 뿐이다. 문제는 실업이 존재할 때 수요량을 늘리기 위해 노동의 가격을 내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수요를 이동시키는 데 있자. 그것은 각각의 가격 수준에서 노동의 수요량을 늘리는 것이며 최저임금의 수준에서도 모두가 일을 갖게끔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활동의 수준을 확장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현대 경제이론의 맹점을 보여주는 부분인데, 최근에 사람들이 거의 고정관념처럼 선호하는 의식은 신이 늙은 케인즈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케인즈가 유효수요 부족이라는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 경제학자들 중의 한사람인데도 말이다.
책 pp.82-84





주류경제학이 의심스러운 상식인들을 위한 책


사실 주류 경제학에서 내뱉는 온갖 말들은 '상식'과는 다른 것들이 많다.
(이 책에 소개된 것만 해도 그런데, '최저임금'은 노동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것은 실업의 결과가 아니라 실업이 발생하는 원인이다, 월 60만원도 안되는 실업수당이 예약임금이 되어서 실업을 일으킨다 등등....)

물론 '상식'이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적인 곡예와 비현실적인 추상화, 가정들에 입각하여 나온 이론이 '상식'보다 더 현실/진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그러나 '상식인'(요즘 한윤형 씨의 글을 읽다보니 지식인이나 엘리트에 대비되는 '상식인'이란 말이 입에 붙었다)들로서는 학자들이 도표와 계산을 제시해가면서 이렇다는데 뭐라고 딱 반박할 말이 안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뭔가 이상한데?" 싶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거나, 아니면 빈부격차나 실업 등에 대해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는 거구나 하고 체념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 결국에는 그런 경제학적인 이데올로기들은 하나의 '상식'으로 굳어져버린다.
교과서나 신문에 범람하는 '시장실패', '정부실패', '자발적 실업', '복지수혜자들의 도덕적 해이', '정부는 비효율적이고 시장은 효율적임' 같은 말들의 힘이다. )


그런 주류경제학의 노동시장, 최저임금, 실업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영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찜찜하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찜찜하던 부분은 분명하게 밝혀주는 불빛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뭔가 분명한 진실을 말해주는 것 같던 경제학들이 과연 얼마나 현실/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나 하는 회의가 들게 된다. 그러다가 열성적인 독자라면 결국 새롭고 대안적인 경제학 이론들을 찾아나서게 될 것이다.

나도 청소년노동인권에 대해 공부하고 활동하면서 최저임금과 일자리, 비숙련 노동 등의 문제를 많이 고민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많은 부분 좀 더 정리된 논리들을 갖추게 되었다.
최근 이명박 정부 이후로 한국의 복지는 상당 부분 축소되고 있고,
올해만 해도 경제 상황 악화와 일자리 등을 이유로 최저임금을 삭감해야 한다는 재계(자본가들)의 요구 때문에 최저임금이 (물가인상 등과 비교하여)'사실상 삭감'되었다.
청년실업의 문제, 서민 경제의 침체는 갈수록 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 책은 나온 지 오래 되긴 했지만 대중적인 경제서로 읽힐 만한 의의가 있다.


노동경제학자이면서도 어렵지 않게(물론 노동시장을 설명하는 부분 같은 경우는 좀 머리를 굴려가면서 읽어야 하지만 대체로 쉽게 읽을 만하고 이런 부분은 좀 건너뛰어도 큰 문제는 없다;;) 이론적인 이야기와 상식적인 말 사이를 넘나들면서 좋은 책을 쓴 로랑 꼬르도니에 씨와 이 책을 번역한 조홍식 씨 등에게 다시 한 번 한 독자로서 감사의 뜻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