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공현 2008. 1. 13. 22:51

2005년 6월17일 실시한 2005학년도 전북 중등 문예백일장 및 독후감 발표 도 본선대회에서 백일장 산문 부문 상 받은 녀석입니다. 아니, 그 작품 그 자체는 아닙니다만 최대한 기억을 살려서 복원해본 것입니다;

『공의 경계』까지 인용하면서, 상당히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늘어놨습니다.-_-

주제가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런 글을 써내다니, 나도 참... 어찌 보면 튀고 어찌 보면 평범한 글이지요.


 우어, 사실은 쓰면서 기분은 상당히 침체된 녀석이고, 또 쓰고 나니 제가 허가도 받지 않고 사례로 도용한 이야기들의 주인공 분들께 대단히 죄송한 마음이...; 으그..

용서해주세요!



누구누구의 영향으로 저도 요즘 휴머니스트가 되나 봅니다.(笑) 아니, 원래부터 그런 경향은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편은 아니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휴머니스트라기보다는 애니미스트를 지향하고 있지만.(그런 용어는 없어요.)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나는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랐다. 신경질적인 큰이모에게 혼나가며 노래를 배우던 일이라든가 술담배 냄새가 옷에 밴 할아버지와 씨름을 하던 일 같은 것들은 지금도 상당히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으며 외가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내 성격이나 생각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외가에 관련된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할머니께서 성경을 옆에 펼쳐놓은 채 눈을 꼭 감고 기도를 하시는 모습이다. 외가 식구들이 다들 기독교 신자로 할머니는 집사, 큰이모는 성가대 지휘자, 그리고 작은이모는 목사님과 결혼한 사모님이셨던 탓에 내게 기독교는 어릴 때부터 가장 익숙한 것 중 하나였고 진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사랑의 예수그리스도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아버지였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기독교에서 정을 뗀 지도 몇 년은 되었지만 그 영향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처음 존경했던 존재가 세계의 성인으로 꼽히는 예수였고 그 뒤에는 감히 비교할 대상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전지전능의 절대자가 버티고 있었으니, 세간에 나와 있는 위인전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 중 내 존경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대신해줄 수 있는 위인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위인전에서 그려내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위인’이라는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겠다. 사실 요즘 들어 역사적 인물을 ‘영웅이 아니라 인간’으로 그렸다고 하는 소설이나 영화 같은 것들이 유행하고 있는 것도 흔히 나와 있는 위인전이나 상식의 이런 면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다. 위인전들은 대개 암살당하기 전날에 여러 애인과 잠자리에 드는 마틴 루터 킹이라든가 신경질적인 이순신 장군 같은 모습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미화된 ‘위인’을 만들어내는 데 전념한다. 그들도 인간이며 실수를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결함도 있다는 사실을 감춘 채 말이다.
  하지만 조금 자라면서 머리가 굵어지게 되면 위인전이 제시하는 지나치게 미화된 모습을 불신하게 되기 마련이다.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게 되면 위인들의 인간적인 면이나 결함 같은 것들도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단점이나 흠들 때문에 그들은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되어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내게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란 흠 하나 없는 완전하고 위대한 존재여야 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런 점은 존경할 만하지만 이런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아.”라면서 편식을 일삼곤 했다. 그 당시 내가 그나마 존경했던 것은 도교에서는 태상노군이라며 신으로 받들기도 하는 노자였다. 노자라는 인물이, 그가 실제로 있었는지도 의문시될 정도이며 그 삶에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라고는 거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결국 내가 바라보고 있던 것은 하나님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환상이었던 셈이다.


  방 안에 혼자 틀어박혀서 생각해본다면 노자가 제시하는 추상적인 실체인 도(道)라거나 결함이라곤 없는 완전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아버지의 모습 같은 것들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방 밖으로 몇 발짝만 나와 보면 또 이야기가 다르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정수기를 팔러 발품을 파시는, 친구의 집안 사정을 알게 된다든가, 수술을 받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도 넘어져서 까맣게 된 손을 툭툭 털며 1시간 길을 걸어가는 할머니를 우연히 돕게 된다든가, 어머니와 언쟁을 벌이다가 홧김에 실수로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친구의 고민을 듣는다든가, 어설픈 첫사랑에 어쩔 줄 몰라 하다 혼자 멋대로 실연당하고서는 몇 시간을 눈물로 메운다든가 하는 일들을 겪다보면, 사람들이 열심히 이 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느끼게 된다. 일본 소설가 나스 기노코 씨가 썼듯이, 초월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더럽다 욕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 더러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월을 원한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이고, 강한 것은 오히려 그 더럽고 비참한 인생을 견뎌내는 사람들이다. 가요 「청계천 8가」에 나오는,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라는 가사에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것은, 「청계천 8가」가 기타를 잡은 청년들의 애창곡 중 하나인 것은,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실로 위대함을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언제나 이론보다 풍부하다. 나는, 예전에는 위인들을 결함이나 단점이 있다는 점에서 존경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들에게 결함이 있다는 것 때문에 존경한다. 그리고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그 강인함과 위대함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