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소설 - 신세기 수기

공현 2008. 1. 13. 22:57

 서기 2005 7/9 토요일 저녁 20시에 갑자기 머리를 때리는 느낌.
그 전까지 쌓여오던 짜증과 나 자신 및 세상에 대한 분노, 안타까움, 현대에 대한 애증이 한순간 끓어올랐다.
PC방으로 달려가서 자판 앞에 앉아 21시 55분까지 자판을 두들긴다.
채 다 못 쓰고 다음날 다시 두들긴다.
그렇게 이틀만에 다 써버렸다... OTL
 

 

덧. 7/11 약간 불완전한 부분 수정.
     8/21 상동

   

 

 

 

 





신세기 수기(新世紀 手記)


  오늘밤은 검은 비가 내린다. 옛날에도 눈을 맞으면 옷이나 우산에 검은 자국이 남는 일은 있었지만, 요즘 내리는 비는 아주 노골적으로 검다. 풀잎 위에 맺힌 빗방울도 검고, 밖에 나가면서 썼던 우산도 온통 더럽혀져 있다. 그 검은 성분들은 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 걸까. 에이치투에스오스리, 에이치엔오스리, 산업먼지, 그런 것들만으로 그런 빛깔이 나올까. 그 검은 빛조차 흐릿하기만 한 검은 비.
  애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니 고양이 울음소리다. 고양이 울음소리는 어린애와 비슷하다고 한다. 옛날에 들은 바로는, 고양이는 아이가 태어나는 날에 지붕 위에 올라가 아이의 혼을 훔쳐간다고도 한다.
  방에는 컴퓨터가 없다. 컴퓨터는 믿을 수 없다. 독일에는 감시 카메라가 늘었다고 한다. 한국은 어떨까. 한국에는 감시 카메라가 별로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저기 어딘가에 그런 것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팔면서 그들은 그 안에 그런 것들을 숨겨두는 건 아닐까. 나는 극단적으로 방 안에 가전제품을 들여놓는 일을 꺼리고 있다. 그러나 가전제품을 들여놓지 않더라도, 그들이 나를 감시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오늘 저녁에는 아르바이트가 없다. 책상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주섬주섬 양말을 신는다. 지금 방바닥에는 개미가 없는 듯하다. 전에는 방바닥을 살피면 집에 사는 조그맣고 빨간 개미들을 서너 마리 볼 수 있었다. 얼마 전 집주인은 집안의 개미들을 박멸하겠다며 개미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개미들을 없애지 말아달라고 하고도 싶지만 하숙비도 가끔 밀리는 주제에 그렇게 말하자니 너무 뻔뻔한 듯하여 말하지 못하고 있다. 개미가 없는 곳에는 바퀴벌레가 없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양말 곁을 기어가던 개미를 떠올린다. 더듬이를 흔들며 꼼지락거리던 그것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개미 굴 속에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미시의 어둠 속에는.
  발목까지 덮는 바지를 입고, 손등까지 덮는 웃옷을 입고, 안경, 모자, 마스크를 쓰고, 얇은 장갑 한 켤레까지 끼고 밖으로 나선다. 만년필과 나이프와 하모니카도 잊지 않는다. 친구들의 유품. 들고 다니는 것에 별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몸에서 떼어놓고 싶지는 않다. 만년필과 나이프 같은 경우 휴대하는 게 편할 때도 있다. 삶이 지긋지긋해질 때 나이프를 보면, 그 섬뜩한 광택이나 삶과 죽음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얇은 경계선의 이미지에서 오싹한 기운을 느끼고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삶에 대한 욕망이 깨어난다든가...
  흰 우산을 들고서 나선다. 계단을 내려간다. 아래층, 주인집에서는 불빛이 새어나온다. 여러 가지 소리도 들려온다. 자동차 소리, 종소리, 기차 소리, 총소리, 신음소리, 이야기소리.
  이 도시에서, 흰 우산은 인공위성과 비행기만 떠있는 검은 하늘의 조그만 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육안으로는 관측되지 않는 육등성.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로 가고 싶지. 어디로 갈까. 고양이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골목을 걷는다. 골목에는 노란 가로등이 켜져 있다. 골목의 조명을 좀더 밝게 바꾸지 않는 것이 예산 부족이나 그런 이유가 아니란 것은 모두가 안다. 첨단 카메라는 그런 조명에 그리 구애받지 않는다. 검은 비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는 검은 비 속에서 더 사람들을 잘 찍을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발표로는 몇몇 우범지역에만 카메라를 설치했다고 하지만 그 지역이 어디인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설치한 자들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꿰뚫는 시선이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확실한 일 아닐까. 몸뚱아리는 카메라 앞에서 광대 짓을 하고 있다. 날 바라보는 검은 관찰자는 웃고 있을까. 아니다, 검은 관찰자는 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은 너무도 깨끗하고 밝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간 나는 어디론가 간다.


 

  어디에서 오든, 어디로 가든, 난 골목을 지날 때면 묘한 것들을 만나게 된다.
  첫 번째 것은 미묘한 부재다. 골목을 지나다가 내가 홧김에 술병을 던져서 깨뜨리면 그건 얼마 안 있어 사라진다. 걷어찬 돌멩이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마치 골목의 가로등 빛에 녹아버리는 듯이. 내가 발로 걷어찼던 담벼락에는 발자국이 남아있지 않다. 존재는 순간이다. 그에 비해 부재는 영속적이다.
  두 번째 것은 유령이다. 사람들의 유령. 친구들의 유령. 나는 오늘도 민수의 유령을 지나친다. 철순의 유령을 지나친다. 정구의 유령을 지나친다. 순희의 유령을 지나친...... 유령들은 나를 보고 있지 않으며 각자의 일에 열중하지만, 항상 나를 응시한다. 유령들의 시선은 나를 꿰뚫진 않는다. 그저 나를 더듬는다. 유령들은 편한 것 같기도 하다. 죽을 때와 달리 피도 흘리고 있지 않다. 난 그들을 애써 못 본 체 한다.
  번화가로 나오자 고양이 소리가 멀어져간다.
  담배연기를 입에 문 사람이 PC방에서 나온다.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다. 다른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다. 담배 불빛이 순간 깜빡거린다. 아이스크림에서 한 방울, 설탕물이 떨어진다. 그는 마스크를 쓴 나를 힐끗 곁눈질하더니 무표정한 채로 지나친다. 아이스크림을 한 번 핥더니 담배연기를 다시 한 모금 문다.
  나는 선불한 뒤 컴퓨터 앞에 앉는다. 얼룩진 우산을 바닥에 내려둔다. 마스크는 벗지 않는다. 컴퓨터 앞에서 표정을 보이는 일은 썩 불안하다.
  게시판은 시끄럽다. 누군가가 또 한 마디 한 모양이다. 댓글 수가 수백을 헤아리고 답글이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Re : ,  Re : , Re : ....... 커다란 글씨. 색이 들어간 글씨. 욕설. 혹은...... 나는 머리를 의자에 기댄다. 오늘도 분노로 키보드를 두들기기를 포기한다. 집을 나설 때 몸을 지배하던 개미와 바퀴벌레와 고양이에 대한 사고의 흐름은 단절되고 흩어진다. 심호흡을 해보지만 담배연기만 폐부로 들어와서 미간만 좁혀질 따름이다.
  나는 시간도 다 채우지 않고 PC방을 나온다. 검은 비가 내리고 있다. 유령들이 서있다. 유전자 조작되어 검은 비에 견디는 나무들이 서 있다. 아직 비 때문에 죽었다는 인간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인류도 유전자 조작되었을지 모르겠다. 나무 그림자들이 휘어있다.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유령들을 지나친다.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마시고는 깡통을 골목에서 지근지근 밟아버린다. 어차피 곧 사라지리라. 곧...

 

  하숙집에 돌아와서 우산을 휴지로 닦는다. 휴지는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쓰레기통에는 수북하게 검은 쓰레기들이 쌓여있다. 나는 방바닥에서 개미를 찾는 일에 열중하기로 한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방바닥에 엎드린 채 쌓아둔 책 더미를 헤집으며 개미를 찾던 나는 고개만 살짝 든다.
  주인 부부다. 주인 부부는 대머리다. 늙은 부부다. 불을 켜놓고 바닥에 엎드려 있던 내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학생. 그들은 나를 학생이라고 부른다. 집 컴퓨터가 좀 이상한데 좀 봐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밖에는 검은 비가 오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가서 주인집에 들어간다. 주인집에는 소파가 있고 텔레비전이 있고 컴퓨터가 있다. 전축이 있고 홈 시어터가 있다. 나는 마루에 놓여 있는 컴퓨터를 엄지발가락 끝으로 켠다. 부팅 중에 화면이 검게 되며 정지해버린다. 나는 문득 그 검은 화면 속에 흐릿하게 흔들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 듯하다.
  컴퓨터에 대해 이런 저런 것들을 배운 것은 정구에게서였다. 정구는 신세대였다. 그런 점에서는 민수와는 정반대였다. 민수는 상당히 구닥다리였지만 정구는 새로운 것에 민감했다. 민수가 포크를 부를 때 정구는 얼터너티브락을 불렀다. 민수가 통기타를 칠 때 정구는 컴퓨터로 음악을 조합해냈다. 그렇게 달랐는데도, 신기하게도 그 둘은 꽤 친한 사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화면 속 얼굴들이 희미해져 간다. 다시 한 번 부팅시켜서 검은 화면 속에 떠오르는 그 얼굴들을 보고 싶지만, 옆에서 바라보는 늙은 눈 넷이 부담스럽다. 부팅 도중에 키보드를 두들겨서 설정으로 들어가서 이런저런 것들을 손본다. 뭔가 꼬여있다. 꼬인 것이 잘 풀리지 않는다. 난 꼬인 것을 풀고 싶은 걸까. 글자가 깨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역시 글자가 깨진다. 모니터는 다시 검어진다. 그 뒤에서 사람의 얼굴이 비친다. 컴퓨터 모니터를 부수고 그 사람을 꺼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깰 것인가 깨지 않을 것인가. 풀 것인가 풀지 않을 것인가.
  주인 부부에게 고치지 못한 것을 사과하고 하숙집을 서둘러 나온다. 컴퓨터 고장도 어차피 금방 없던 일이 될 것이다. 뒤에서 쳐다보는 주인 부부의 묘한 눈길을 느낀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울린다. 문득 지극히 현대적인 괴담을 떠올린다. 요즘 주택가에서 점점 늘어나는 고양이 울음소리는 아이가 울고 있는 것처럼 가장해서, 그 아이의 울음소리에 무슨 일이 있나 나오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쳐놓은 함정이다. 이 시대는 그런 사람들을 제거해가며 이루어진 것이다. 그 증거로 목이 쉬도록 온종일 짖던 동네 개들은 하나하나 없어지고 있다. 개들이 고양이를 쫓아내기 때문이다. 어둠을 짖는 개들은 하나하나 잡혀나가고, 갇혀나가고, 죽어나가고 있다.

 

  나는 그대로 그 골목으로 간다. 골목에는 가로등이 있고 감시 카메라가 있고 부재가 있고 유령들이 있다. 컴퓨터 속의 것들은 너희였니.
  유령들은 문득 고개를 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골목 밖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울린다. 정적은 아무 곳에도 없다. 한 방울, 두 방울, 검은 비가 이마에 떨어진다. 소름끼칠 정도로 차가운 감촉의 비가 내리려는 듯하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조금씩 커진다.
  정적이 있다. 자동차 경적 소리가 멎었다. 비가 멎었다. 갑자기 유령들이 입을 열려 한다.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느릿느릿, 영화의 슬로우 모우션처럼. 골목 구석에 유리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깡통이 찌그러져 있다.
  갑자기 무서워진다. 혼란스러워진다. 달린다.

 
 

  골목을 나오자 비가 내리고 있다. 검은 비. 요즘은 집을 하얗게 짓지 않는다. 검은 비에 맞으면 온통 얼룩이 남기 때문이다. 오히려 집을 지을 때부터 얼룩 비슷한 무늬를 넣는다. 어떤 건물들은 군복 같기도 하고, 위장복 같기도 하다. 그들은 그것을 현대적인 감각의 건축미학이라고 부른다.
  비를 맞는 건 몸에 좋지 않아, 학생. 집 앞에는 못보던 탁한 검은 빛의 차 한 대가 주차되어있다. 교통 혼잡은 증가하고, 주차공간은 부족해져 가지만 자동차는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다. 주인 아주머니는 우산을 들고 대문간에 나와서 서있다. 거기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애매하게 대답한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던 걸까. 이 집 자식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있다고 하던데, 혹 오늘 돌아오는 걸지도 모른다. 그와의 사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애초에 별로 얼굴 마주칠 일도 없는 데다가 나는 대개 방에 혼자 틀어박혀 있는 것이다. 미소를 띠고 있는 아주머니 곁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간다. 비 때문인지 몸이 끈적거린다.
  계단을 다 올라가기 전,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분명히 나올 때 불을 껐었는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본다. 방 안에서 사람의 모습이 움직인다. 하나. 둘. 한 마리. 두 마리. 계단 아래를 본다. 주인 아저씨가 서있다.
  학생, 그러니까 왜 가출 같은 걸 했어.
  그 말을 듣자마자 난 주인 아저씨의 비웃음인지 동정일지 모를 묘한 웃음을 피해 계단에서 뛰어내린다. 계단은 담 바로 위에 있기 때문에 한 번 도약으로 담까지 넘어 집 밖, 골목으로 몸이 떨어져 내린다. 몸을 묶어놓는 중력 가속도의 감각. 귓가를 스치는 공기. 2층 정도 되는 높이에서 뛰어내린 탓에 발바닥이 저려온다. 다행히 발목을 다치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다. 대신 떨어지는 순간 몸을 구부리며 충격을 줄이려다가 그만 무릎에 팔목을 찧었다. 발보다 오히려 팔목이 아프다. 아직 뛰기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쁘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뒤를 돌아보기가 무섭다. 잡힐 것 같다.
  역시 어딘가에 카메라가 있었던 걸까. 잡히게 되면 나는 어디로 보내질까. 다시 할머니 집에 갇힐까. 아니면 감옥으로 보내질까. 정신병원으로 보내질까. 소위 조금 '왼쪽'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다 정신병자로 취급받는다는 소문도 있었지. 정신 없이 달리는 도중에 산발적으로 질문들이 떠오른다. 비가 얼굴을 때린다. 점점 끈적거린다. 피부가 근질거린다. 이 비를 맞는 것만으로 체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어느새 비가 내리지 않는다. 나는 다시 그 골목에 서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유령들도 그 골목에 서있다. 가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가로등 불빛이 휘어진다. 유령들이 내게 걸어온다.
  왜, 왜 나만 살아남은 거지. 숨을 고르면서 중얼거린다. 작은 중얼거림이지만 이 골목에는 크게 울려 퍼진다. 유령들에게는 똑똑히 들릴 것이다.
  너희에 비해서 나는 아무 것도 잘 하는 게 없고,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나를 가둬놓고 품안에서 기르려는 할머니만 남아있는데, 이렇게 무능한데, 어째서 너희가 죽고 나는 산 거지. 이런 쓸모 없는 녀석이. 친구들은 내 중얼거림에는 대답해주지 않는다.
  공터가 사라졌어. 우리가 모여서 떠들던 공터가. 이제 없어. 밀어버린 거야. 온통 건물들이 빽빽하지. 빌딩 숲이야. 도심이야.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 곳이야.
  철순이 이야기한다. 철순은 죽을 당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공사차량에 치어버렸을 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공터는 이미 사라졌어. 뭐가 어쨌건 우린.
  정구는 중얼거리다가 말을 끊는다. 정구는 투신했다. 그것이 자살이었는지 타살이었는지, 그런 건 제대로 판명되지 않는다.
  우리 노래는 팔리지 않았고 순희의 시도 읽히지 않았지. 정구가 만든 인터넷 포럼은 엉망이 되어있어.
  민수는 기타를 손에서 놓아버린다. 터엉.... 기타가 땅에 떨어지면서 울린다. 민수는 겨우 없는 일자리에 위장취업했다가 산업병으로 죽었다.
  가로등이 깜빡거린다. 조금 전까지 쫓아오던 그들은 이제 쫓아오지 않는 걸까.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까 부딪힌 팔목이 부어있는 걸 깨닫는다.
  그럼 너희는 왜 여기 있지? 내가 중얼거린 말에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온다.
  내가 썼던 시구를 기억해? 골목은 도시의 중심. 도시의 중심은 간판이 화려한 시내도, 대학로도, 시청도 아냐. 이런 골목들이지. 도시에서 죽은 우린 도시의 중심을 떠돌고 있어. 세기, 너도 여기를 떠돌고 있구나.
  모두가 죽은 뒤, 순희는 약을 먹었다.
  여긴 아무도 오지 않아.
  여긴 감시 카메라가 없어.
  여긴 죽은 개들의 장소니까.
  여긴 폐허니까.
  여긴 정적이 있고 여유가 있고 망가짐이 있지.
  나는 가만히 땅바닥에 앉는다. 혹사시킨 다리에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깨진 병조각. 찌그러진 깡통. 더럽혀진 벽. 휘어진 가로등.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뒤에서는 그들이 쫓아올 텐데.
  이제 아침이슬 따윈 없어. 아침에 풀잎을 봐. 풀잎에 맺힌 건 온통 끈적거리는 검은 이슬이지. 그걸 이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만성적인 스모그에 가려 태양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더위의 정체는 알 수 없지.
  MIB가 쫓아올 거야. 세기, 넌 정신병원으로 가겠지. 이 도시에서 우리는 미친놈이니까. 잠수함 속의 토끼는 미쳐 날뛰는 거니까.
  MIB.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내가 무슨 외계인이라도 된단 말일까. 그것은 정구 특유의 농담이다. 그들은 무엇인가. 그들은 그것인가. 그들은 있는가.
  우린 졌어.
  그 말과 함께 비가 내린다. 유령들이 사라졌다. 가로등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경적이 다시 들린다. 몸이 끈적거린다.
  빌어먹을.
  땅을 짚고 일어선다. 시멘트로 된 도로가 질척거린다. 고양이 울음소리.
  피부를 덮은 검은 빗방울이 답답하다. 답답함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머리로 피가 몰린다.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낸다.
  빌어먹을!
  부어오른 쪽 팔뚝에 옷 위로 나이프를 댄다.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눈을 질끈 감고 나이프를 당긴다. 옷과 함께 살이 베이는 감촉이 섬뜩하게 전달된다. 다듬어진 통증이 내달린다. 눈을 조심조심 떠보자 꽤 깊게 베인 듯 피가 제법 나온다. 검은 빗방울이 상처에 흘러 들어가자 한층 상처가 쓰라려온다. 통증이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만약 칼로 베인 상처 안에서 피가 아닌 검은 기름이 흘러나왔다면 나는 정말로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숨이 더 가빠진다.
  팔을 들어올린다. 피가 흘러내려 옷을 적신다. 숨은 점점 가빠진다.
  이제 이슬이 없다면 앞으론 이 피로 대신하겠어! 듣고 있냐! 여기엔 피가 흐르고 있단 말이다!
  공허하게, 외침이 메아리친다. 뒤에서는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왼쪽에서 뛰고 있는 심장이 분명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