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시 - 어느 저녁 무렵

공현 2009. 12. 14. 12:05



어느 저녁 무렵


불그스레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오면
힘이 빠진 사람은
계단가나 길바닥에 주저앉아도 좋다.

해지기 얼마 전 공원가,
머리칼 없이 뽀얀 두 살배기가
젊은 엄마를 보채며 앙앙대고 있으니까,
벤치에 앉은 양복이 펴든 신문뭉치엔
빽빽한 활자가 날카로운 모서리를 갈아놓고 있으니까,
검푸른 잠자린 물결에 구겨지는 연 위에서 꼼짝도 않고 있으니까,

그 건너엔,
호수와 백조보트와 다리와
물결에 흔들리며 저무는 텅 빈 하늘이
침묵하니까

힘이 빠진 사람들
불야성의 도시에 등을 보인 사람들은
공원을 거쳐, 저녁을 거쳐,
다시 불빛 아래로 걸어 들어간다

해돋이와 해거름 사이에
유리파편 같은 가래를 목이 따갑도록 삼켜
보고는 하는 사람들은
아무데도 닿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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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잘 안 쓰는 스타일의 시인데, 2005년에 썼던 시를 여기로 옮겨오면서 다시 다듬은 거다.
원래는 실제로 어느 저녁날에 전주 덕진공원에서 썼다.
원래는 좀 더 군더더기도 많고 호흡도 꼬여 있었다.
여전히 미묘한 부분들이 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