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2008. 1. 13. 23:08

본래 2004년 연세대 논술 문제 답안으로 쓴 것이지만... 아무래도 이건 논술이라기보단 수필 같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노년, 죽음이라는 한계상황 앞에서


 늙는다는 말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어휘이다. 그러나 막상 그 뜻을 정확히 하려고 하면 모호한 구석이 많은 어휘이기도 하다. 노화는 분명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는 것이 곧 늙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똑같이 나이 육십인 사람들이라 해도 그 중에서 좀 더 늙은 사람, 좀 더 젊은 사람을 나누어 볼 수 있다. 나이 사십에도 세상 풍파에 시달려 폭삭 늙어버린 사람을 찾아볼 수 있다. 육체적인 노화의 경우에도 상당한 개인차가 있으며, 어느 정도 그에 발맞춰 진행되는 정신적인 노화도 개인차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곧 늙는 것의 개념은 단순히 나이가 얼마인지보다는 개별적인 개체들의 경우 나타나는 모습을 관찰함으로써 이해해야 한다.


 늙는다는 것은 결국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인간이 마모되고 삐걱거리며 고장나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늙으면서 나타나는 것은 죽음의 징후 또는 그 징후에 대한 반응이다. 전자의 예로는 저하된 운동능력, 골다공증, 주름살, 침침해지는 눈, 폐경, 호르몬 분비 변화에 따른 기분변화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사람이 자신이 늙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사람은 임박해오는 죽음에 대해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하게 된다. 둘로 나누자면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과 죽음을 부정하는 방식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느냐, 삶에 집착하느냐. 죽음을 받아들이면 늙을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경향이 있고 거부하면 마음이 편협해져가는 경향이 있다.


 욕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받아들일 때 욕망은 감소한다. 욕망은 현재에 속하며 미래를 지향한다. 그러나 자신이 가까운 시일에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내일은 없다. 오늘의 반복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런 유형의 노인은 무기력하고 욕망을 잘 품지 않으며, 설령 욕망이 생긴다 해도 금방 체념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죽음을 거부하는 경우 욕망은 증가한다. 그런 경우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 저항하기 위해 삶에 더욱 집착한다. 내일이 없다면 바둥거려서 내일이 오도록 하겠다는 집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이런 노인들은 살 날이 얼마 안 남았기에 삶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노인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늙어가는 것을 서글프게 생각할 때, 그는 무엇보다 젊음을 부러워한다. 노인들은 욕망을 품더라도 그 욕망에 매진할 열정이 없다. 따라서 그들의 욕망은 미련이다. 죽음을 받아들인 경우에는 세월의 흐름이 별 문제될 게 없겠지만, 죽음을 거부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세월이 흐를수록 미련만 더욱 커져간다. 미련은 커져 가는데 삶에 지친 노인들은 젊은이들처럼 문을 박차고 나설 수도 없으니 또 젊음에 대한 미련만 커진다. 악순환이다. 탄식과 실망, 후회, 편협함 같은 것만 남게 된다. 어찌 보면 한계상황에서는 조용히 굴복하는 자세가 인간으로서는 지혜로운 것일는지 모른다. 그것이 무기력하고 체념적인 태도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여하간 그 죽음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닌 한, 인간은 죽음 앞에서 깨끗하게 비굴해지거나 추잡하게 비굴해질 수밖에 없다.


 티치아노의 그림, 「인간의 세 시기」에서 저 뒤편 노인이 해골과 함께 앉아 있듯이, 노년기란 죽음과 함께 하는 시기다. 그 죽음을 긍정하건 부정하건 노인의 화두는 죽음이다. 노인에게 세월이 흘러간다는 것은 죽음과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실감할 수 있는 때가 노년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계상황과 대면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이 좋은 선택이 되기는 힘든 일이다. 차라리 자기 손으로 의미 있는 일에 생명을 내놓는 게 더 나은 것일 수도 있다. 세월이 흘러서 죽음과 대면했을 때 인간이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고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 다루든 그 결과는 비굴하다면, 아예 그렇게 되기 전에 자기 손으로 세월을 멈춰버리는 것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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