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

조직의 부재 :: 여하간 문제는 조직화다

공현 2010. 2. 15.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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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에서 우려되는 현상 중 하나가 조직의 부재이다. 어쩌면 이 말이 낯설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조직만 있고 개인은 없다, 전체주의적이다, 집단주의적이다 같은 류의 이야기들이었으니까는. 그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이야기로 들리는 조직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는, 분명 쌩뚱맞게까지 들릴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개인주의적이지 못하다는 지적과 조직이 약하다는 지적은 모두가 사실성을 담고 있다.

  여기서 조직(뭐 커뮤니티나 공동체라고 표현해도 좋다.)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자발성/자기이익/공익에 근거하여 사회적으로 구성된 집단, 그리고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정치적․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집단을 말한다. 예컨대 지역의 커뮤니티, 생활협동조합, 노동조합, 학생회, 공익단체, 정당 등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적 개념을 빌자면 이런 조직들을 '자발적 결사체'나 '시민사회' 등의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결사체들은 사회에 다양성을 증진시키고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집단적 정치 참여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한국 사회에도 강한 조직들은 있다. 그러나 그런 조직들은 대부분 국가 권력이나 대자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자발성에 근거하고 있는 자발적 결사체로는 보기 어렵고, 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개인은 없고 조직만 있다'라고 말할 때 그 조직은 주로 국가, 학교, 군대, 대기업, 지연, 학연, 그밖에 군사 독재의 부산물로 탄생했으면서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조직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일부 친목적 기능을 수행하는 커뮤니티들(부녀회라거나)도 여러 요인들 때문에 사회적․정치적 기능과 가능성은 미미하다 하겠다. 요컨대 지금 한국 사회는 국가․자본이 조직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며, 자발적인 조직화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런 서술은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것으로, "한국은 시민사회가 약하고 국가가 강하다."라는 분석과 비슷한 의미일 뿐이다.



2

  조직의 부재는 개인의 원자화라는 결과를 낳는다. '학생운동'이라는 형태로 80년대-90년대 초에 비교적 높은 자발적 조직화율을 보여주던 20대-대학생들의 현재를 관찰하면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난다. (최근에 각광받는 "88만원 세대"(박권일,우석훈)나 "자기계발하는 주체"(서동진) 등의 논의들을 보면 각각의 이론적 틀에서 그런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라고 쓰면서 정작 아직 서동진 씨 책은 안 읽어봤다 -_- 서평만 읽어봤지;;) 그렇지만 20대의 경우에 이러한 '변화'가 더 눈에 잘 띈다는 것 뿐, 이는 비단 20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매우 낮은 노조조직률, 껍데기뿐인 학생회, 지역 기반 운동의 부진,(지역주의적이고 국가 권력을 등에 업은 정당들을 제외한) 정당들의 적은 당원 수 등등… 우리는 한국 사회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이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개인의 원자화가 사회의 보수화를 불러온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서, 원자화된 개인은 사회 변화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없으며 사회 구조에 적극적으로 편입된다. 무력감 속에서. 문제들은 항상 개인화되고, 개인이 어떻게 대처해야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정치적/집단적 해결책은 사라지고 윤리적/개인적 해결책들만이 제시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로부터 당한 부당한 피해를 주변 사람들을 조직하여 행동하고 정치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개인으로서 제도에 의존하는 방법을 택한다. '신고'처럼 권력기관에 의한 제도적 구제를 요청하는 방식. 아니면, 자신이 사회적 권력자(또는 일종의 영웅.)가 되는 방식. 이 두 방식 모두 대단히 '비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식들만이 '현실적'인 방식들로 받아들여진다.

  무력감이 없어야만 민주주의라는 더글러스 러미스의 지적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런 상황이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계급상승의 꿈이나 출세의 꿈을 꿀지언정 스스로 사회의 주인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논의하여 해답을 도출해내기보다는 권리를 위임하고 권력 기관에 의존한다. 시민 사회가 약하고 국가가 강력한 상황이 역으로 국가 권력을 더 강고하게 한다는 것은 우울한 재생산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적'이라는 말은 기껏해야 공직선출권-피선거권과 선거권 이상으로 얼마나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인가? 건강하고 잘 굴러가는 정당이 없이는 국회나 정부 등이 잘 기능하기 어렵듯이, 다양한 조직들이 존재하지 않는 - 시민 사회가 약한 상황에서는 민주주의가 잘 운영될 수 없다.




3

  운동의 영역에서, 조직의 부재는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일정 이상의 규모를 가진 조직이 없는 상황에서 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은 극단적으로 좁아진다. 제도적인 기구들에 의존하는 대응, 이슈파이팅, 입법운동 등등... 파업 등의 방법도 거의 무력화되어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이는 더 두드러지는 문제점이다. (한국의 운동들이 많은 경우 입법운동에 치중하게 되는 것은 이런 우울한 현실 탓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민 없는 시민운동" 같은 말들이 시민단체를 비난하려는 의도로만 사용되는 것은 다소 부당하다. 단체들의 운동 방식을 더 개선하기 위한 연구들도 있어야겠지만, 한국 사회 전체가 조직화가 안 되는 판에 그것을 단체들만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이른바 '대중'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경로들이 매스미디어와 거리선전 등 외에는 거의 없는 상황은 운동 주체들에게 끊임없이 두통이나 과로 같은 건강상의 문제들을 안겨주는 원인이 되고 있다.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들의 자발적 봉기가 가장 건강하다는 식의 주장은 낭만주의자의 근거 없는 환상이다. 비조직 대중들의 자발성을 역설하는 사람에게, 나는 "아 물론 사람들에게는 그런 자발성이 있죠."라고 말해준 다음에 그런 '대중들' 속에서 기존 사회의 건강하지 못한 현실들을 수없이 많이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논의할 수 있는 구조[조직/공론장]조차 없는 막막한 상황에 부딪히게 될 것임을 과거의 사례들을 들어가며 들려줄 수 있다. 평소에 어떤 방식으로든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개개인들의 자발성은 촛불집회처럼 일시적이고 돌발적인 상황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아무리 암울하고 원자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인간에게는 바람직한 사회성이 살아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는 하겠지만, 그 자체만으로 지속적인 사회 변화로 이어지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차라리 팬클럽이나 인터넷 카페, 동호회 등의 조직들이 촛불집회에서 한 활동들을 연구해보는 게 더 나을지도.)

  그리하여 우리의 과제는 조직화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조직이 없다면 조직을 만들면 된다. 긴 시간이 걸리고 매우 어려운 일이더라도, 여하간 필요한 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만일 조직이 없는 이 현실이 많은 사람들이 조직화하고 조직화되는 경험을 함으로써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면, 청소년 대중 조직화나 청년 조직화 등은 장기적인 해결책 중 일부를 담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10대 때 조직화를 경험하고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해결 방식을 경험한 사람들이 30대 40대 50대 60대...(후략)... 가 되어도 조직화되기 쉽다고 가정한다면, 혹은 한나 아렌트 표현대로 '정치적/공적 자유'의 능력을 가지게 된다면 말이다.(과거 20대 때 학생운동[조직화]을 경험한 사람들이 꼭 그 이후에 조직화되어 있느냐, 하는 반문이 분명 가능하며, 따라서 이걸 주된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건 매우 뻘쭘한 일이다. 동시에 추진되는 다양한 해결책 중 하나 정도의 위치로 이해해야 한다.) 어쨌건 그런 류의 가정을 하지 않더라도, 10대든 20대든 30대든 40대든, 0대든 80대든, 조직화는 필요한 일이니까.

  여하간, 그리하여, 문제는, 조직화다.






(네스티캣 님의 미디어다음 연재 웹툰, 트레이스에서....)







# 이 글에서 '조직화'나 '조직'을 사람에 따라서 '함께하기'라고 읽든 '공동체'라고 읽든 딱히 반대하지는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