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난 월드컵에 반대한다

공현 2010. 6. 21. 22:50

(본격 까달라는 글? -_-)


사촌동생에게 수학을 좀 가르쳐주러 갔던 날의 일이다.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과 대한민국(남한이든 한국이든 여하간) 축구 국가대표팀 사이의 경기가 끝난 바로 다다음날이라서, 아니나 다를까 월드컵 축구 이야기가 나왔다.

동생들 "우리가 아르헨티나한테 져서 기분 나빴어."

나의 삐딱한 입은 각각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인 사촌동생들을 상대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공현 "왜 우리야?"

동생들 "응?"

공현 "경기를 하고 진 건 한국 축구 대표팀이잖아. 니가 진 거 아니잖아."

동생들 "우리나라니까 우리지."

공현 "한국 국적을 갖고 있더라도 경기해서 니가 이기거나 지는 건 아니잖아. 왜 우리가 이기는 거고 우리가 지는 거야?"

동생들 "아 우리나라 팀이니까 우리지."

공현 "난 별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한국 축구팀이 얼른 지면 좋겠어. 나이지리아도 지고 16강도 안 가고."

동생들 "헐. 왜?"

공현 "시끄럽고 응원한다고 사람도 지하철에 얼마나 바글바글한지.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7월에 있는데 그 전에 월드컵이 끝나면 좋겠거든."  (* 7월 13, 14일에 있는 성적공개 일제고사를 말함.)

동생들 "뭐야 그게. 우리가 이겨야지. 그래야 기분이 좋지"

공현 "우리가 아니라니까. 한국 축구팀이지. 근데 왜 한국팀이 이겨야 하는데?"

동생들 "우리나라니까 우리가 이기면 좋지."

공현 "반대로 한국 축구팀이 이기면 진 다른 팀 나라 사람들은 어떨까?"

동생들 "아르헨티나한테 졌을 때 우리 기분 같겠지 뭐. 나이지리아는 꼭 우리가 이겨야 돼."

...... '왜 한국팀이 이겨야 하고 다른 나라 팀이 지는 건 괜찮은가, 왜 한국팀이 이기면 좋은가'에 대한 이야기는 급기야 이 이야기는 이렇게까지 발전한다.

동생들 "아르헨티나는 나쁜 놈들이야."

공현 "왜?"

동생들 "어, 마라도나가 한국 막 깔보고 그랬어."

공현 "그래? 그럼 그 사람이 잘못한 걸지 몰라도 왜 아르헨티나가 나빠?"

동생들 "그 사람이 아르헨티나 사람이잖아."

공현 "그래? 그럼 조두순도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은 나쁘겠구나."

동생들 "어... 조두순은 싫어."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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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건 나는 월드컵을 반대한다.

사실 찾아보면 월드컵을 반대할 이유야 많다. 아동노동착취나 남아공 월드컵 준비 이면에 숨겨진 철거와 폭력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FIFA와 세계자본의 돈벌이를 비판할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 교육문제, 인권문제를 공론화시키면서 활동을 하는 입장에서 월드컵에 관한 스포츠 기사들이 언론을 도배질하고 사람들의 화제거리가 온통 월드컵으로 쏠리는 것이 얼마나 내 활동에 지장을 주는지 이야기할 수도 있다. (어쨌건 사람들의 기억력과 화제 용량, 언론 지면이란 한정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일단은 한 가지 현상에 초점을 맞춰보려고 한다. 국가주의 - 애국심 - 국가(또는 국가의 대표들)와 나의 동일시.

예전에 '올림픽에 대한 불편함' 이란 제목으로 끄적인 글이랑 같은 맥락에서다.

국가 대항 운동 경기는 '국가대표'들과 '국가대표'들 사이에 경쟁을 붙이고 이를 통해 국가들은 국민들의 단결력을 강화한다.
그 과정에서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국가대표 선수들과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국가대표 운동선수들과, 그 국가의 사회 체제나 정부 체제와,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같지 않다. 각각의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는 큰 연관이 없어 보인다. 운동선수들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 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거나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월드컵을 통해서 단지 그 나라에서 축구를 잘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만든 팀들끼리의 경쟁이, 국가와 국가 사이의 경쟁인 것처럼 바뀌게 된다.

국가대표(엘리트)와 자기의 동일시. 국가대표와 국가의 동일시. 국가와 자기의 동일시.
사실 굉장히 국가주의/민족주의적인 심리상태이고, 어마어마한 정치적인 효과이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 참여연대가 유엔안보리에 정부의 의견과 다른 내용으로 편지를 보냈다고 해서 길길이 뛰는 정부 사람들과 우파 단체들을 생각해보라. 국가를 하나로 묶어내고 정부의 의견이 곧 국민/국가의 의견인 것으로 만들려는 데에도 그와 동일화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국가를 위해 개인의 정당한 인권을 유보하라." 국가주의적 맥락에서 정당화된 수많은 인권침해의 역사들은, 국가와 자기를 동일시한 사람들의 묵인 속에 이루어졌다.

국기에 대한 경례나 맹세를 강요하는 것도 인권침해라고 반대 운동을 했고, 모든 국가가 폐지된 사회를 상상하는 나에게 월드컵이 그 '당연하다는 듯이' 내뿜고 있는 국가주의의 열기는 심리적으로 혐오감이 들 정도이다. 내 생애에 빨간색이 이렇게 싫어진 때가 처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민주적인 의식은, 국가와 정부(엘리트/대표들로 이루어진)와 자신, 인민(시민이라고 하든 국민이라고 하든)들을 분리하고 국가 권력을 견제하며 자신들의 힘으로 사회를 바꾸고 만들어가려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국가주의를 내면화시키는 효과적인 이벤트인 월드컵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이미 월드컵이니 교과서니 해서 특정한 정치적인 경향을 학습하도록 하고 있으면서 교사들의 정치 활동에는 눈에 불을 켜고 짤라버리겠다고 으르렁대는 정부의 위선....



난 축구를 좋아할 뿐이야 / 난 그저 다 같이 즐기는 축제가 좋을 뿐이야 ??


물론 이런 비판을 두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난 축구를 좋아할 뿐이야", 또는 "나는 그저 다 같이 거리에서 즐기는 축제 같은 분위기가 좋을 뿐이야."라고 하는 이야기들이 대표적.

그저 축구를 좋아할 뿐이라는 분들에게는, 그렇다면 굳이 한국 축구 대표팀이 이기든 지든 상관 없이 축구를 즐기시라고 하고 싶다. 한국이 이기든 지든 월드컵은 정해진 경기 수를 다 치러나간다. 한국 대표팀이 축구라는 경기에서 뭔가 특출나고 흥미로운 특성을 가진 팀이 아닌 이상, 축구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굳이 한국 대표팀을 응원해야 할 이유는 없다.

혹시 "축구를 좋아할 뿐이지만 내가 응원하는 팀은 한국팀이야. 잘 아는 선수들도 많고 친숙하고..."라고 하시는 분들에게는,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게 된 그 배경에 '애국심'이나 '국가주의' 같은 요소가 눈꼽만큼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나라면 자신할 수 없다.) 혹시 그런 요소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와 상황 속에서는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것 자체를 다소 경계하는 게 좋을 수도 있다고 권해드리고 싶다.


다 같이 거리에서 즐기는 축제 같은 분위기가 좋다는 분들에게는 먼저 고개를 끄덕여드리고 싶다. 개인화되고 분절되고 생계의 압박 속에 치어 돌아가는 삶 속에서 거리를 점거하고 벌이는 집단 축제를 욕망하게 되는 것은 대단히 인간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왜 굳이 월드컵에서만 이러한 축제가 만들어지는가, 왜 굳이 이토록 국가주의적인 이벤트에서만 그런 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의문은 떨치기가 어렵다. 어쩌면 그런 축제 같은 분위기, 즐거운 광장에서의 행사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국가주의적인 방식으로 포섭하고 이용하는 것이 월드컵은 아닐까?
   (2010년 월드컵에서는 자본들의 개입도 노골적이다)

그래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즐기는 축제로서 월드컵 응원을 하러 간다는 분들에게는, 월드컵 말고도 훨씬 더 인간적인, 국가주의나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 민주적인 축제를 욕망해보실 생각은 없냐고 제안하고 싶다. (2008년의 촛불은 어쩌면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즐기시더라도, 그 안에서 끊임없이 내면화되는 국가주의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가져주시길 바란다고 부탁드리고 싶다.


(... 애국이 왜 나쁘단 거? 이 매국노 새퀴. 일본으로 가버려라!   --> 이런 분들에겐 별로 드리고 싶은 말도 없고; )


추신 : 그래서, 여하간, 나이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과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에서 한국이 져서, 적어도 내 주위에서는 그런 열기가 좀 수그러들기를. 그리고 7월 13, 14일 일제고사 반대 운동에 열기가 더해지기를.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 졌을 땐 정말 만세를 불렀다니깐. 열심히 연습하고 경기한 선수 분들에겐 죄송한 말이지만-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차피 그 상대 팀 선수 분들에겐 죄송할 일 없는 것이니 쌤쌤.